민주당 허 찌른 타이밍의 승부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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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호 11면

미디어 법안 처리를 둘러싼 여야의 전쟁이 22일 끝났다. 지난해 12월 초 한나라당이 법안을 제출하면서 시작된 여야의 싸움은 무려 8개월을 끌었다. 한나라당은 ‘6월 국회’의 종료를 사흘 앞둔 이날 미디어 법안을 단독 처리했다. 국회 본회의장 진입과 의장석 선점이란 승부수를 띄워 민주당의 접근을 봉쇄했다. 그 중심엔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있었다. 한나라당은 원내대책을 주도한 그에게 박수를 보냈고, 민주당은 그에게 당했다며 한탄을 했다.

한나라 ‘미디어법 돌파’ 지휘자, 안상수 원내대표

72시간의 ‘박근혜 스트레스’가 고비
안 대표에게 스트레스가 가장 컸던 시기는 20~22일 사흘 동안이다. 그가 ‘20일 직권상정 처리’를 공언한 19일 오후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는 “(본회의에) 참석한다면 반대 표결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청천벽력 같은 얘기였다. 그런 가운데 민주당 정세균 대표는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안 대표는 고민했다. 박 전 대표의 말을 무시하고 밀어붙일 순 없었다. 친박계가 등을 돌리면 법안 처리는 물거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20~21일 이틀간 민주당과 릴레이 협상에 들어갔다. 동시에 박 전 대표와 자유선진당과도 접촉, 그들의 입장을 반영하는 수정안을 만들었다.

친박계와 선진당은 방송에 대한 신문과 대기업의 지분참여 한도를 줄인 수정안을 보고 “그 정도면 됐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민주당은 요지부동이었다. “절대 반대”에서 조금도 후퇴하지 않았다. 안 대표는 다시 강공으로 선회했다. “한나라당이 하루 더 협상하는 시간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한 민주당의 허를 찔러 22일 오전 9시 협상 결렬을 전격 선언했다. 그리고 한나라당 의원들을 모아 본회의장을 점거했다. 이어 김형오 국회의장이 법안 직권상정을 발표했고, 같은 날 오후 법안은 민주당이 탄식하는 가운데 처리됐다.

안 대표의 수정안은 당내 불만을 샀다. 정병국 미디어특위 위원장 등이 “원안의 취지가 많이 훼손됐다”며 불평할 정도였다. 하지만 안 대표에겐 법안 처리가 더 중요했다. “우리(한나라당)가 단합하고 선진당의 도움을 얻기 위한 정치적 결단으로 수정안을 만든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그 점을 친박계도 높게 평가했다. 박 전 대표와 가까운 한 중진의원은 “수정안에 우리의 입장이 거의 다 반영됐다”며 “안 대표가 그렇게 빨리 반응할 줄 몰랐다”고 말했다.

‘누더기 법안이라는 지적이 있다’는 질문에 안 대표는 “원안 쪽이 맞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이 분열되면 법안이 사망해 버리는 것 아니냐”고 답했다. 그러면서 “일단 법이 시행되면 야당의 (여론독과점) 주장이 틀렸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고, 불합리한 규제도 개정할 여지가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지나친 양보로 누더기법” 비판도
안 대표는 22일 오전 민주당이 최고위원회의를 열고 있을 때 본회의장 점거를 지시했다. 이강래 민주당 원내대표가 최고위원들에게 “마지막까지 협상하겠다”고 말하고 있을 때 적수의 허를 찌른 것이다.

안 대표는 민주당 의원총회가 22일 오전 10시에 열린다는 사실을 알고 한나라당 의총 시간을 오전 9시로 정했다고 한다. 민주당 의원들이 국회로 모여들기 전에 먼저 의총을 열어 협상 결렬을 결정하고, 바로 본회의장을 장악하는 수순을 밟은 것이다. 민주당의 한 재선 의원은 “안 대표가 야당 시절 원내대표를 해 본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작전을 잘 세우더라”며 “이번엔 완전히 당했다”고 말했다. 안 대표는 17대 국회의 마지막 한나라당 원내대표였다. 2007년 대선 때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후보에 대한 BBK 의혹 등으로 여야가 격렬하게 싸웠을 때 그는 원내에서 민주당과의 공방전을 지휘했다.

안 대표는 김 의장에게 직권상정을 요청하면서 ‘건의드린다’는 표현을 썼다. 직권상정 여부는 의장이 결정하는 만큼 김 의장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다. 김 의장이 직권상정을 주저하자 그는 “3월에 국회의장이 중재해서 6월에 표결처리하기로 국민 앞에 약속한 만큼 이번을 넘길 수 없다”며 설득했다. 의장실 관계자는 “안 대표가 취임 이후 ‘국민과의 약속’을 거론하며 계속 김 의장을 압박했으며, 그 말에 김 의장은 큰 부담을 느꼈다”고 전했다.

민주당이 22일 “하루 더 협상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고 오판한 건 안 대표가 파격적인 협상안을 계속 냈기 때문이다. 그는 이강래 원내대표 등에게 “신문과 대기업의 지상파 소유를 2012년까지 제한할 수도 있다”며 “우리가 정권을 재창출하기 위한 목적에서 신문과 방송의 영역을 허무는 내용의 미디어 법안을 만든 게 아니다”고 했다 한다. 그런 그를 보고 한나라당의 한 문방위원도 “민주당과 좀 더 협상하고 23일쯤 직권상정할 걸로 생각했다”고 밝혔다.

반면 민주당이 6월 국회에 등원한 건 그의 강공 드라이브가 먹혔기 때문이다. 지난달 26일 안 대표는 단독 국회를 열었다. 그리고 “미디어 법안을 직권상정할 수 있다”며 민주당을 압박했다. 민주당이 요구한 이명박 대통령의 사과 등 ‘5개의 조건’을 하나도 들어주지 않으면서 법안 단독 처리 가능성을 시사하자 민주당은 등원투쟁으로 전략을 바꿨다. ‘강경파’로 알려진 그가 협상과정에선 유연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꾀도 냈다. 그러다 결국은 강공으로 밀어붙여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그에겐 숙제가 생겼다. 장외로 나간 민주당과의 대화채널을 복원하고, 그들을 국회로 끌어들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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