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문학가 권정생씨 장편 '한티재 하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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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하늘 높고 밝은 햇살 비춰야할 가을인데도 먹장구름만 가득 드리운 것 같다. 무슨 배가 그리 고프다고 몇 푼 때문에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아들 손가락을 자르고 부모를 죽이는 패륜의 세월.

신문 보기가 겁난다. 아무리 어려워도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지난 1백년간 우리 산하에서 이러저러한 삶을 살다 죽어간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려한다. 어머니한테 듣고 또 내가 보았던, 하늘을 이고 나름대로 이쁘게 살다 죽어간 이름 없는 사람들을 다시 내 작품 속으로 그대로 들어오도록 하겠다. "

아동문학가 권정생 (權正生.61) 씨가 우리 민족의 1백년 삶을 다룬 장편 '한티재 하늘' (총 6권 예정) 1부 두권을 이달말 지식산업사에서 펴낸다.

권씨는 알려졌다시피 일본에서 출생, 해방 이듬해 귀국 후 초등학교만 졸업한 채 나무장수.고구마장수.예배당 종지기를 전전했고, 19살 때부터 지금까지 독신의 외로움 속에서 중증의 폐.신장결핵과 싸우고 있다.

그러나 권씨는 식민지와 전쟁이 한 개인을 어떻게 망가뜨렸는가를 온몸에 짊어지고 있으면서도 '몽실언니' 등의 동화를 통해 따뜻한 인간애를 지켜왔고 이제 우리 민족의 슬프고 아름다웠던 1백년 살이를 다음 세기에 들려주려는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문둥병 때문에 시집에서 소박 맞은 분옥이를 색시로 삼은 떠돌이 동준이의 한없이 아름다운 사랑. 갓난 아들과 색시 그리고 아버지를 남겨두고 항일 의병에 가담했다 전사한 길수, 반란군 아들을 두었다고 순검에 끌려가 못물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된 영감, 그리고 홀어머니 밑에서 튼튼하게 자라가고 있는 서억의 이야기.

또 심덕이 좋은 19살 난 김진사집 여종 사월이. 그 사월이를 사러 10년 머슴살이 새경을 다 털어넣은 기태. 기태와 사월이가 어떻게 사랑하고 죽고 그들의 눈에 비친 우리 산하와 냉이꽃.달래꽃.풀꽃. 이 작품에는 뚜렷한 주인공이 없다.

또 작가는 작품 속의 등장인물들의 삶에 전혀 간섭해 들어가지 않는다.

물레실을 자으면서, 삼을 삼으면서 어머니가 들려주던 이 사람 이야기, 저 사람 이야기를 들은대로 옮겨적고 있을 뿐이다.

이야기 중간에 끼어들었던 어머니의 아름다운 표현들을 가물가물 기억해내며, 혹은 더욱 간절하게 표현해 놓은 이 작품은 때문에 가장 민초다운 이야기에 가장 민초다운 미의식을 담고 있는 장편 서사시로 읽히게 된다.

"분단.정치.종교.자본 등에서 나온 이념이 개인적 삶의 근본을 둘러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평범한 사람들의 구체적 삶마저 이념에 의해 굴절되게 비춰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저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으로만 남고 싶다. 그리고 이 이야기들이 경제난을 맞아 다시 슬픈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고 그래도 꿋꿋하게 사람의 본성을 잃지않고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정말 좋겠다. "

경북 안동시 인근 외딴집에서 외롭게 살아가고 있는 권씨. 누구보다 더 곤궁하고 고단한 권씨가 슬픈 사람들을 위로하겠다며 금세기가 끝날 때까지 이 작품에 메달리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따뜻한 인간애와 우리 민족의 삶을 다음 세기까지 고스란히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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