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이어 또 스타일 구긴 ARF 외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2면

23일 폐막된 제16차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2차 핵실험 강행을 정당화하는 북한의 주장이 그대로 반영된 의장성명이 채택돼 논란이 예상된다. 태국 푸껫에서 27개 회원국 외교장관들이 참가한 이날 회의가 끝난 뒤 발표된 의장성명은 모두 39항 가운데 한반도 문제에 대해 2개 항을 할애했다. 이 가운데 7항에서는 “일부(several) 국가 장관들은 최근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규탄했다”며 “그들은 유엔의 모든 회원국이 안보리 결의 1874호를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는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고 밝혀 한국과 미국 등의 입장을 담았다.

하지만 8항에는 “북한은 미국의 사주(instigation)로 채택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1874호를 전면적으로 거부했다”며 “북한은 최근 악화되고 있는 한반도 상황이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의 산물이며 6자회담이 이미 끝났다고 밝혔다”고 명기했다. 8항에는 또 “북한은 특히 분단의 지속화와 함께 한반도 남반부에 반세기에 걸쳐 주한미군이 존재하는 특수한 상황을 강조했다”며 주한미군 주둔을 문제 삼은 북한의 주장까지 담겼다. 이와 관련, 정부 당국자는 “의장성명은 의장국(태국)의 고유권한으로 회담 때 나온 발언을 요약한 것”이라며 “우리 주장이 7항에 담겨 있어 문제 삼지 않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ARF 회의의 성과를 담은 유일한 공식 문서인 의장성명에 유엔에서도 배척된 북한의 주장을 수평적으로 병기한 의장성명이 나오도록 방치한 것은, 한국 등 관련국들의 외교적 대응이 적절치 못한 데 따른 결과라는 비판도 일고 있다. 지난해 싱가포르에서 열린 15차 ARF에서는 의장성명 초안에 6·15와 10·4 남북 합의 준수를 주장한 북한의 입장과 금강산 피살 사건을 비난한 한국 입장이 초안에 병기됐다가 뒤늦게 이를 알고 두 주장 모두 삭제하는 것으로 절충된 적이 있다.

한편 북한 대표단의 이흥식 외무성 국제기구총국장은 한·미 당국이 새로운 북핵 해법으로 제시한 ‘포괄적 패키지’ 방안에 대한 거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 국장은 이날 기자회견을 자청해 “포괄적 패키지는 부시 행정부의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핵 폐기)를 그대로 넘겨받은 것”이라며 “말도 안 되는 것”이라고 일축했다. 이 국장은 또 “(미국이) 핵 폐기를 하면 이런 저런 패키지를 준다고 하는데, 북한이 핵을 갖게 된 계기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며 “6자회담은 이미 끝났다”고 말했다.

푸껫=예영준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