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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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제5장 길 끝에 있는 길

봉환이가 처음 불만을 터뜨린 동기는 배완호의 됨됨이가 어쩐지 탐탁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윤씨와 억죽박죽 수작을 주고받다 보니 얘기의 핵심이 빗나가서 윤씨를 외사촌의 퇴직금이나 삼키려드는 사기꾼으로 만들고 말았다.

동기는 그게 아니었는데, 수다를 떨다 보니 얘기의 핵심이 옆길로 새버렸는지 알 수 없었다.

윤종갑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아예 본전을 까먹을 작정하고 장삿길로 나서지 않는 바에야 이문은 반드시 생길 것이었다.

그렇다면 외사촌이 가졌다는 종잣돈에 대해서 더 이상 헐뜯을 것이 못되었다.

가게로 돌아왔더니 혼자서 술청을 지키고 있던 묵호댁이 불퉁가지를 터뜨렸다.

며칠 사이 가게일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바깥으로 쏘다니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터뜨린 심술이 분명했다.

요즘 와서 분주하게 설쳐대는 봉환의 거동에서 불안의 냄새를 맡은 게 틀림없었다.

묵호댁의 처지에서 보면 봉환은 집안으로 들어와 날아다니는 새처럼 불안하기만 했다.

언제 창구멍으로 날아가 버릴지 기약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봉환은 묵호댁의 가당찮은 간섭에 배알이 뒤틀렸다.

초례청을 차리고 혼례를 치른 부부 사이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동사무소에 가서 혼인신고를 한 일도 없는 사이였다.

골목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짐승처럼 어쩌다 보니 만나서 잠자리나 같이 하는 사이가 되어버린 것인데, 정분이 돈독한 결발부부처럼 감 놓아라 대추 놓아라 굴러간다 주어 놓아라 하는 꼴이 쓸개에서 신물이 기어오를 정도로 못마땅했다.

아니래도 어디 가서 실컷 행패나 부리고 싶던 김에 잘 만났다 싶었던 봉환의 입에서 듣기에 험한 한마디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이런 씨발. 남이야 어딜 쏘다니든지 니가 왜 중뿔나게 나서서 지랄이야? 늙어빠진 게 감히 뉘 앞에서 여편네 행세 하려 들어. 피칠갑하고 싶어서 환장했어?" 물론 정식부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봉환의 입에서 그토록 험악한 욕설이 튀어나올 수는 없었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묵호댁은 이제 막 뽑아 입에 물려던 담배를 쥐고 장승처럼 서서 봉환을 바라보았다.

"왜? 시방 나잇살이나 처먹었다고 행세하는 거야? 주제에 걸핏하면 담배는 왜 빼물어?" 너무나 엄청나고 터무니없는 힐난이었으므로 눈물이 저절로 쑥 빠졌다.

피우려던 담배를 식탁 위로 던지는 묵호댁의 시선이 창 밖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설혹 묵호댁에게 분수에 걸맞지 않은 실수가 있었다 할지라도 발설해도 좋을 말이 있고 삼가야 할 말이 있었다.

남자인 봉환과 비견해서 늙은 나이 때문에 묵호댁의 가슴은 언제나 불안했던 게 사실이었다.

그것이 이상하게 자격지심으로 작용했었고, 나이차로선 큰누님 뻘인 여자와 동거하고 있다는 한 가지 사실 때문에 봉환이가 남에게 빈축이나 사지 않을까, 놀림감이나 되지 않을까, 칼날 위를 걷는 것처럼 항상 조마조마했었다.

평소에도 육담이 걸쭉하고 입술만 들썩했다 하면 욕설이 튀어나오는 어부들이 봉환의 처지를 희롱하기 사양할 턱이 없겠으니 필경 창피를 당할 때도 없지 않으리라. 그런데 봉환은 공교롭게도 묵호댁의 가장 아픈 그 곳을 호비칼로 도려내듯 한 것이었다.

심술이 났다 할지라도 이렇게 야박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묵호댁은 수건으로 콧물을 닦아냈다.

그런데 봉환은 어느새 조리대의 도마 위에 놓여있던 식칼을 집어들더니, 제 분에 못이겨 대여섯 번이나 벽을 찍어대고 있었다.

식도를 타고 울컥 치미는 것이 있었으나 묵호댁은 참기로 하였다.

봉환에 대한 애꿎은 미련 때문이었다.

동업하던 한씨네라는 작자들이 썰물 빠져나가듯 경상도 쪽으로 떠난 이후 까닭없는 허탈감이 묵호댁의 가슴에도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 허탈감은 머지않아 봉환이도 떠날 것이란 흐릿한 예감 때문이었다.

묵호댁은 가게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선착장을 가로질러 평소 안면을 트고 지내는 채소가게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그녀는 선반에서 먼지 묻은 소주 한 병을 집어들었다.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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