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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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제5장 길 끝에 있는 길

대전에서 빈둥거리고 있다던 배완호가 주문진에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사흘 뒤였다.

그가 당도했다는 통기를 받고 윤씨집으로 달려갔을 때, 배완호는 넥타이도 풀지 않은 말쑥한 정장 차림으로 봉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깍듯한 예법을 차리는 것이 오히려 봉환을 긴장시켰다.

게다가 초인사를 나누는 찰나에 봉환으로선 낯설기만 한 명함을 내밀었다.

석달 전에 퇴직했다는 금융회사 재직 때 사용하던 명함이었다.

형광등 아래에서도 유난히 반짝거리는 금테안경까지 끼고 있었기 때문에 도무지 썩 달갑지가 않았다.

첫눈에 궁합이 틀렸구나 싶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봉환으로선 입빠른 소리를 할 수 없었다.

인사를 나누고난 뒤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자리에서 배완호는 과연 괴팍스럽고 결벽성이 있다던 윤씨의 평판을 뒷받침할 만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배완호의 시선은 시종일관 방바닥에만 머물러 있었다.

봉환이가 엉덩이를 들어 자리를 고쳐 앉을 때마다 옷깃에서 떨어지는 고기비늘이나 담배먼지 따위를 손가락 끝으로 찍어서 재떨이에 옮겨 담았다.

거의 오분 간격으로 안경을 벗어 안경알을 꼼꼼하게 닦았고 그런가 하면 뒷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 계속 자신이 앉아 있는 주위의 방바닥을 닦아냈다.

얼핏 보아도 결벽성을 넘어 정신적 병증으로 볼 수밖에 없는 배완호의 괴팍스런 거동에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하면서 윤종갑과 나누고 있는 대화조차 줄거리를 종잡을 수 없게 되었다.

목구멍으로 치미는 열통 같아선 다짜고짜 한주먹 쥐어박고 싶은 심정인데, 윤종갑의 외사촌이라니 마음 놓고 행패를 부릴 수도 없었다.

꾹 눌러 참고 있으려니 위인의 요상스런 거동은 더욱 확대되어 시선에 들어와 눈부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견디다 못해 밖으로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오고 말았다.

아니나 다를까 낌새를 알아차린 윤씨가 뒤따라 나섰다.

"형님. 저 사람 외사촌 맞는 깁니껴? 아니면 바쁜 김에 임시변통으로 정신병원에 가서 닥치는 대로 끌고온 미칭개이 (미친사람) 입니껴? 솔직하게 말해 보소. "

"이봐, 봉환이, 임자의 배알이 뒤틀린다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네. 아마 속까지 니글니글해서 토할 것 같을 거야. 나도 마찬가지야. 그러나 우린 참아야 해. 나는 것이 능숙하면 기는 것이 시원치 못하고, 기는 것이 능숙하면 나는 것이 시원치 못하다는 성현의 말씀도 있지 않나. 사람이 다소 단작스러운 게 정신병자처럼 보이겠지만, 저런 사람에게 좌판을 맡겨두면 정리정돈이나 잔고품 정리는 제대로 할 것 아닌가. "

"성현의 말씀은 아니지만, 앓느니 차라리 죽어버린다는 말도 있다는 거 알아요?" "글쎄, 임자 기분은 알고 있다니깐. 하지만 참아야 할 일이 있어. 내 사촌이 우리가 장거리로 나서면 당장 써야할 사업자금 기백만원은 변통해 가지고 왔다는 걸 알아야지. 내가 마련한 종잣돈으로는 아무래도 빠듯하거든…. " "형님 마련하겠다던 종잣돈이 바로 배완호 주머니 속에 들어 있다는 퇴직금 아닙니껴?"

"이봐, 봉환이 왜 이러나? 한국은행권에 퇴직금이라고 찍힌 돈이 따로 있었나? 더 뱅크 오브 코리아는 몰라도 퇴직금이라고 찍힌 돈은 아직 못봤네. " "차라리 벼룩의 간을 빼먹지. 형님 심보가 그러면 못쓰는 거라요. 알토란 같은 외사촌 퇴직금을 통째로 들어먹으려 들다니. 에프킬라 시대라고 세상이 뿌리째 타락해도 되는 겁니껴? 막가파가 있다카니 형님도 이제 막갈라 캅니껴?"

"임자의 말 듣고 있으면, 우리가 처음부터 작정하고 본전 까먹는 장삿길로 들어서서 종잣돈 날려버리고 줄행랑 놓아서 사기꾼 되자는 얘기 아닌가.

임자야말로 그래도 되는 게야? 퇴직금 아니라 과부의 속곳에 든 대변돈을 빌렸다 할지라도 팔아서 이문 남겨 되돌려 준다는 각오도 없이 외사촌의 돈을 종잣돈으로 쓸까? 내가 그런 후레자식으로 보여?"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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