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턴 “북 비핵화 땐 관계 정상화 논의 용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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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22일 “북한이 완전하고 비가역적(irreversible)인 비핵화에 동의하면 우리는 관계 정상화를 논의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참석을 위해 22일 태국 푸껫에 도착한 클린턴 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이같이 말하고 “북한이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에 나선다면 미국은 파트너로서 앞으로 갈 것이며, 인센티브로는 관계 정상화가 있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클린턴 장관이 공개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비핵화를 조건으로 관계 정상화를 언급한 것은 처음이다.

클린턴 장관은 그러나 “북한이 협상장으로 돌아오는 것만으로는 보상하지 않겠다”며 “돌아오지 않으면 국제적 고립과 제재에 직면할 것”이라고 말했다.

클린턴 장관의 발언에서 보듯, 되돌릴 수 없는 폐기를 뜻하는 ‘비가역성’ 개념이 새로운 북핵 해법으로 떠오른 ‘포괄적 패키지’ 전략의 핵심 원칙으로 규정되고 있다.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도 이날 클린턴 장관과의 회담에서 이 원칙에 동의를 표시했다.

‘포괄적 패키지’ 전략은 핵 폐기에 이르는 북한의 행동 조치를 단계별로 나눠 이행하고, 그때마다 상응하는 보상을 제공하는 기존 6자회담 협상 방식을 지양하고 처음부터 최종 목표인 핵물질과 무기의 폐기 조치까지 모든 현안을 포괄해 협상 테이블에 올린다는 구상이다.

한·미가 비가역성을 강조하는 것은 과거 영변 핵시설의 동결(1994년 제네바 합의)이나 불능화 합의(2007년 6자회담)와 같은 합의들이 진정한 북핵 폐기와는 거리가 멀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북한이 마음먹기에 따라 원상 회복시킬 수 있는 조치가 아니라, 한번 이행하면 되돌릴 수 없는 행동 조치를 비핵화의 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미다.

정부 당국자는 “불능화 조치를 지금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당시 협상 당사자들의 판단처럼 ‘비가역적’ 조치가 아니라 ‘가역적’ 조치에 지나지 않았음이 북한의 행동으로 입증됐다”고 말했다. 북한은 영변 핵시설, 특히 재처리시설을 불능화 대상에 포함시켰지만 최근 원상 복구시켜 추가로 플루토늄을 뽑아내겠다고 선언했다.

비가역적 폐기는 미국이 한때 사용을 자제했다가 최근 되살린 용어이기도 하다. 6자회담 초기 미국의 부시 행정부는 북핵 폐기의 원칙으로 이른바 ‘CVID’를 제시했다. 완전하고(complete), 검증 가능하며(verifiable), 되돌릴 수 없는(irreversible), 폐기(Dismantlement)의 머리글자를 딴 것으로 당시 미국 외교 정책의 핵심 세력이었던 네오콘이 주창했다. 이 가운데 북한은 특히 ‘되돌릴 수 없는’이란 표현에 극렬한 거부감을 보였고 2005년부터는 미국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정부 당국자는 “비가역성은 예전에는 세 가지 원칙 가운데 하나였는데, 요즘 미국의 포인트는 오로지 비가역성에 집중되고 있다”고 최근 흐름을 전했다.

◆북한, “회원국에 대한 공격은 삼가야” = 북한 대표로 ARF에 참석한 박근광 외무성 본부대사(차관급)는 주최국인 태국의 카싯 피롬야 외무장관을 만나 “특정 회원국(북한)에 대한 공격이 ARF의 주요 의제가 되어선 곤란하다”는 뜻을 밝혔다고 익명을 요청한 회담 소식통이 전했다. 태국 측은 이에 대해 “유념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소식통은 덧붙였다. 한편 유명환 외교장관은 이날 양제츠 중국 외교부장, 나카소네 히로후미(中曾根弘文) 일본 외상과도 잇따라 회담했다.

푸껫=예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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