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관전기]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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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제3회삼성화재배세계오픈 본선대국장으로 정해진 삼성화재 유성연수원은 초목의 푸르름과 잔디와 붉은 벽돌의 건물들이 잘 조화된 고적하고 아늑한 곳이었다.

본선대국전날 (1일) 추첨이 끝나고 야외에서 만찬을 할 때 32명의 세계강호들은 저마다 갈고 닦아온 칼날을 가슴속에 숨긴채 적어도 겉으로는 "바둑두기 참 좋은 곳이다. " 며 미소를 지었다.

조훈현9단은 스승 후지사와 슈코 (藤澤秀行) 9단과의 해후를 위해 대국자중 유일하게 부인과 동행했는데 슈코9단은 얼굴에 검버섯이 짙게 퍼지고 등이 굽은 추레한 노인의 모습 그대로였지만 왕년의 대고수답게 안광만은 날카롭게 살아있었다.

골프광으로 소문난 조치훈9단은 얼굴이 인디언처럼 검붉은 색이어서 화제였다.

그는 연신 포도주를 가져다 마시며 내일의 상대인 유창혁9단의 존재를 잊은듯 보였다.

추첨에서 가장 불운한 기사로 꼽힌 사람은 조선진9단. 어려서 일본에 건너갔던 그는 이번 대회에 예선전에서 승승장구하여 여기까지 왔으나 운나쁘게도 첫판에 저승사자같은 이창호를 만나게 되자 실망한 모습이 역력했다.

젊은 프로기사들의 모임인 소소회 멤버 40명과 여류기사 전원이 내려와 수련과 관전, 그리고 기록을 맡았다.

장막안에서 천기를 엿보는 전략과 풍운의 바둑세계, 그들중 진정한 강자는 누구일까. 아침 일찍부터 산책으로 가슴을 달래던 기사들은 식당에서 셀프서비스로 아침을 마친 뒤 대국장으로 모여들었다.

대국장은 세개. TV중계대국으로 선정된 유창혁 - 조치훈전은 넓은 독방에서 두어졌다.

(선수들은 이방을 가장 싫어한다.

상대가 장고할 때는 일어나서 옆판도 보고 하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곤 하는데 이곳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원로격인 조남철9단 슈코9단 구도 노리오 (工藤紀夫) 9단 네웨이핑 (攝衛平) 9단등 4명의 대국은 별실에서 두어졌다.

75세의 조9단과 73세의 슈코9단은 어린 시절 일본기원 원생 동기였으니 감개무량하게도 근 60년만에 같은 방에서 대국하게 된 것이다.

9시반에 대국개시. 오전은 잔잔하게 흘러갔다.

설령 우세하더라도 승부는 3~4시 언저리의 중반전에서 판가름나는 법. 가장 먼저 끝난 대국은 역시 조남철9단의 바둑. 중국의 위빈9단과 대결한 조9단은 점심 직후인 2시무렵 돌을 던졌다.

곧이어 40대의 나이에 무명기사의 꿈을 실현하며 대망의 본선에 진입했던 부산의 김준영3단이 1승만 거둬달라는 동료들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노장 구도9단에게 완패했다.

한때 한국기사들이 전멸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퍼졌다.

한국의 신예들은 세계정상급들에겐 역시 한수 아래여서 대부분 고전중이었고 조훈현9단과 유창혁9단 서봉수9단은 물론 이창호9단마저 불리하다는 얘기가 파다했다.

소문을 뒤엎고 가장 빠른 승전보를 전해준 기사는 장수영9단을 꺾은 속기의 이성재5단. 그다음은 이창호9단. 이9단과 대국한 조선진9단은 "중반까지는 분명 좋았는데 나중에 계속 당하더니 10집반이나 졌다. " 며 기막히다는 표정이었다.

박치문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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