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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 특혜 걷어내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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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우리나라 역대 통치자들은 누구나 '중소기업 대통령' 소리를 듣고 싶어 했다.

지당한 경세(經世)철학이다. 산업의 민초(民草)라는 중소기업을 돕자는데 누가 시비를 걸겠는가. 정치적으로 명분과 인기를 얻는 이점도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중소기업 진흥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그래서 이 시기에 우리나라 중소기업 지원제도의 골격이 갖춰졌다. 중소기업 사랑은 권위주의 정권의 전유물만은 아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벤처기업을 육성하는 데서 경제 부흥의 실마리를 찾았다.

중소기업 지원제도의 가짓수만 보면 한국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다. 세금을 깎아주고 싼 이자로 돈을 빌려주는 것은 기본이다. 정부가 '벤처'도장을 찍어주고 혜택을 베푸는 벤처기업 인증제도는 한국밖에 없다.

중소업계를 돕는 기관과 단체도 많다. 중소기업청.중소기업진흥공단.대한상공회의소.중소기업은행.KOTRA.신용보증기금.지역신용보증재단.중소기업정보화경영원.벤처기업협회.여성경제인연합회 등 헤아리기도 힘들다.

우리나라에서 중소기업이 받는 크고 작은 법적 혜택은 100가지가 넘는다. 중소기업 규모를 벗어나지 않으려는 기업도 있다.

이 정도면 한국은 중소기업의 천국이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시중은행마다 우량 중소기업 리스트라는 게 있다. 사업모델과 재무구조가 탄탄해 신주 모시듯 하는 고객들의 명단이다. 그런데 그 수가 너무 적은 게 놀랍다. 은행마다 1000~2000개, 은행권을 다 합치면 1만개 정도로 추산된다. 우리나라 중소기업의 수는 대략 300만개에 육박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알짜 중소업체는 고작 3%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

문제가 뭘까. 그간의 중소기업 사랑이 지나쳤던 건 아닐까. 아니면 애정표현의 방법이 잘못됐을까.

사실 그동안 우리나라의 중소기업 지원책은 업계가 아쉬운 소리를 하면 정부는 들어주기 바빴던 구도였다. 중소기업들은 개방과 경쟁이란 따끔한 자극 대신 중소기업 육성이란 명분 아래 담합과 보호에 익숙해져 버렸다. 중소기업 기본법은 개정할 때마다 업종별 혜택을 주는 예외조항을 하도 많이 신설해 '누더기'법이 됐다.

국민의 세금으로 마련한 각종 중소기업 지원자금은 눈먼 돈인 경우가 적잖았다. 물량 위주의 퍼주기식 지원책이 성행하다 보니 서류만 번듯하게 꾸며 사업자금을 타내는 얌체족들이 비일비재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대기업들은 환란의 주범으로 몰려 혹독한 비판과 개혁에 휘말렸지만, 중소기업에 대해선 회계 투명성이나 경영체질의 개선을 거론하는 이가 없었다. 불쌍한 중소기업은 제발 건드리지 말자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최근 이런 분위기가 바뀌는 조짐이다. 정부가 과거 중소기업지원책의 간판격인 단체수의계약과 중소기업 고유업종 제도를 폐지하겠다고 나섰다. 중소기업에 특혜를 주는 지원방식이 경쟁과 개방의 시대에 더 이상 먹히지 않게 됐다는 판단에서다.

분배와 형평을 중시하는 노무현 대통령 정부가 사회적 약자로 꼽히는 중소기업을 보호하는 정책을 걷어내는 데 앞장선 것은 아이러니다.

중소기업이 잘돼야 경제가 산다는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중소기업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고용의 87%, 산업생산의 51%, 수출의 42%)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불합리한 특혜로 유지되는 기업은 규모가 크든 작든 곤란하다. 작아도 경쟁력 있는 기업으로 키워나가는 게 중소기업 정책의 정도다.

홍승일 경제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