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욱 대기자의 경제 패트롤] 민주노총의 황당한 해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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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지난 주말 KT 노동조합이 민주노총 탈퇴를 결정했다. 조합원 2만8000여 명의 민주노총 산하 최대 기업노조의 탈퇴는 노동계에 일대 파장을 몰고 올 중대 사안임에 틀림없다. 이번 탈퇴 과정을 보면서 내가 주목한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95% 참여에 95% 찬성이라는 수치다. 과문한 탓일지 몰라도 이 정도 규모의 노조에서 이런 참여율과 찬성률을 기록한 예를 알지 못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민주노총의 지도노선에 대한 반감과 염증이 어느 수준이었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결과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KT 노조 집행부가 그간 조합원들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했는가를 되묻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헌법도 재적의원 3분의 2면 바꿀 수 있는데 상급단체 탈퇴의 건에 95% 참여, 95% 탈퇴 찬성이란 투표 결과가 나올 때까지 뭘 하고 있었느냐는 얘기다.

KT 노조에서 민주노총 탈퇴를 요구하는 소리가 본격적으로 터져 나온 게 5∼6년 전으로 알려져 있고, 그 불만이 해를 더할수록 쌓여 턱밑 정도가 아니라 머리끝에 이른 게 이번 결과일 게다. 그러니 민주노총 내부 3개 파벌(국민파·중앙파·현장파) 간의 갈등 속에서 KT 역대 집행부가 캐스팅 보트를 쥐는 영향력을 즐기는 게 아니냐는 따가운 소리를 들을 만도 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

둘째, 짐작은 했지만 그래도 설마 했던 것을 무색하게 한 민주노총의 반응이다.

아무리 뜻에 따른다 해도 산하 최대 기업노조의 탈퇴를 막고 싶은 것까지는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 노력은 정당해야 하고, 결별이 불가피하면 받아들이는 게 순리다. 그런데 투표 전 ‘사측이 개입하면 불매운동 등 강경대응에 나설 것’이라던 민주노총은 투표 결과가 나온 후에도 “이번 투표의 배경에는 민주노총 흔들기 의도를 지닌 일부 보수세력의 개입 의혹이 커지고 있다”며 조직적인 KT 불매운동과 함께 부당 노동행위에 대한 법적 대응을 주장하고 나섰다. 한마디로 황당하다.

어떻게 95% 참여, 95% 찬성이란 결과를 보면서도 일부 보수세력의 개입 의혹 운운할 수 있는지. 거꾸로 묻고 싶다. 일부 진보세력의 개입으로 어떤 사업장에서건 다른 상급단체인 한국노총 탈퇴의 건에 95% 참여, 95% 찬성을 이끌어낼 수 있는지. 이건 그래도 한때 같은 조직에 몸담았던 조합과 조합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불매운동도 마찬가지다. 이 말이 그나마 성립하려면 사측의 사주와 협박으로 조합원 의사에 반해 탈퇴 결정이 이루어졌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95%가 그래서 나온 결과인가? 그걸 밝힐 수 없다면 이는 KT 노조에 대한 명백한 명예훼손이다.

노동조합운동의 기반은 현장이지 정치판이 아니다. 조직력 약화를 걱정하기 전에, 집행부로서 현장 조합원들 위에 군림하고, 상급단체로서 현장의 단위노조에 맹종을 강요해오진 않았는지 자문해야 한다.

박태욱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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