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국회의원 멱살을 잡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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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선생님도 내일 꼭 투표하셔야 합니다.

정부의 높은 관리들을 싹 바꿔치우고, 국회의원 멱살을 확 휘어잡을 사람을 당선시켜야 하거든요. " 지난해 대통령선거 투표 전날 경상도출신의 한 택시운전기사에게서 들은 얘기다.

김대중 (金大中) 후보에게 열성적인 그 기사가 정부와 정치에 대해 갖고 있는 불신.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미 외환위기에 들어갔을 때인데도 그는 경제얘기는 하지 않고 정치에 대한 불만뿐이었다.

그에게는 경제보다 정치가 전면에 나와 있는 것이다.

새 정부가 들어선 지 6개월. 정부의 높은 관리는 많이 바뀌고, 택시 손님은 줄어들고, 살림은 나아질 것 같지 않고…. 그 운전기사는 지금쯤 무슨 말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때마침 김대중대통령은 취임 6개월을 맞은 기자간담회에서 이제는 정치개혁에 착수하겠다고 천명했다.

은행이 통폐합되고, 기업은 구조조정으로 몸살을 앓으면서 폐업.부도소식이 줄을 잇는다.

이런 북새통에 오직 변화가 없는 곳이 정치판이다.

대선이 끝나면서 지방선거.보궐선거로 법석이었고 국회는 산적한 과제를 밀어놓은 채 야당은 전당대회, 여당은 사람 끌어가기에 정신이 없다.

대통령의 정치개혁 천명은 많이 늦은 셈이다.

정치에 대한 불신은 왜 나오고 정치개혁이 필요하다는 얘기는 왜 나오는가.

간단히 얘기하면 그동안 정치에 돈을 너무 많이 썼고, 돈 드는 정치 때문에 관치 (官治) 금융.정경유착 (政經癒着) 이 있었고, 그래서 거품경제의 위기가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치개혁의 출발은 간단하다.

대통령이 정치자금을 한푼도 안 받겠다고 공언해도 소용이 없다.

몇십번 공언해도 그 주변이 깨끗하지 못한 것은 바로 전 (前) 정권에서 우리가 경험했다.

공언도 약속도 소용없다.

오직 돈 안드는 정치구조를 새로 짜야 한다.

지금의 정당들은 당비와 후원금, 그리고 국고에서 나가는 정당보조금만으로는 운영이 어렵다.

방대한 중앙당조직과 2백53개의 지구당 사무국을 꾸려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 조직을 운영해야 한다는 구실로 막대한 정치자금을 만들어 온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정치지도자다.

정치인은 남의 호주머니에서 염치없이 돈을 가져다 쓰는 사람쯤으로 보이고, 자금 조성기술이 잘못 발휘되다보니 수백억, 수천억원의 검은 잉여금이 생기곤 했다.

미국이나 영국의 정당조직은 상시 (常時) 정당체제가 아닌 선거정당 (選擧政黨) 체제다.

선거때만 조직을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지구당까지 상시 정당체제다.

많은 비용이 드는 관료적 상설조직을 아무 비판없이 유지하는 것은 기득권 (旣得權) 수호와 국회의원들의 토호적 (土豪的) 허세 (虛勢) 체질 때문이다.

국회의원은 지역대표가 아닌 국민대표다.

국회의원을 작은 지역구의 사슬에서 풀고, 고비용 정치의 원천인 지구당을 폐지하는 것이 정치개혁의 첫번째 과제다.

정치에도 구조개혁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 국회의원 숫자를 30~50명 정도 줄이자는 얘기가 정당쪽에서 나오고 있다.

50명쯤 줄이는 것이 구조개혁인가.

지구당을 폐지하고 국회의원을 작은 선거구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선거구.선거제도의 재검토와 아울러 의원수를 1백명 이상 줄여야 한다.

의원수를 줄여 선거구를 재조정하는 문제라든가, 선거제도를 고쳐 정당명부식을 겸한 선거제로 바꾸는 문제 같은 것을 지금의 정당, 지금의 국회에 맡길 수 있을까. 필경 정당은 정당들대로 새 선거구나 선거제도가 자기당에 미칠 이해 (利害) 를 먼저 따질 것이고 국회의원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득실을 계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정당의 지도급 간부도 계파 (系派) 의원들의 이해를 감안할 것이기 때문에 지도급 정치인에게도 올바른 구조개혁 작업을 기대하기 어렵다.

해낼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이다.

대통령이 '돈 안드는 정치' 에 뜻만 세운다면 그만이 할 수 있다.

의석분포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정치개혁과 상관없다.

대통령이 곧 착수하겠다는 정치개혁은 정치권 사정 (司正) 과 제도개혁 두가지로 짐작되는데 사정은 과거청산이고, 제도개혁은 미래의 설계다.

사정은 물리적인 것이고 개혁은 화학적인 것이다.

정치체질을 바꾸기 위한 개혁작업에는 기득권과 얽힌 화학적 반응이 복잡하겠지만 누구의 말대로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멱살을 휘어잡아서라도 정치 구조개혁은 해내야 한다.

김동익(성균관대 석좌교수.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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