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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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제5장 길 끝에 있는 길 ⑬

주문진으로 돌아간 것은 이튿날이었다.

그동안 집으로 수다스럽게 전화를 걸었던 사람은 떠난 이후로 전혀 소식이 없었던 철규였다.

그러나 자신의 소재지를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전화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변씨는 일행들에게 아무런 내색도 않고 철규의 소식을 기다렸다.

그가 다시 전화를 걸어온 것은 밤 11시 가까운 시각이었다.

경상도 예천에서 전화 겁니다.

그렇게 허두를 떼는 철규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한선생. 당신 거기서 도대체 뭘하고 있나? 그동안 연락 드리지 못해 죄송 합니다.

죄송할 것 없지. 왜? 한선생이 밀어넣은 종잣돈 송금해 달라는 게야? 넘겨짚지 마십시오. 돈 때문에 전화한 것 아닙니다.

그럼 이런 오밤중에 전화한 까닭이 뭐야? 그게 아니라면 우리가 비싼 통화료 내고 전화할 만치 자별한 사이도 아니니깐 나 전화 끊어. 그리고 전화기가 부서져라 하고 수화기를 내던져버렸다.

곁에서 바라보고 있던 형식이가 볼멘소리를 하였다.

아버지 그거 우리집 재산목록 제일홉니다.

비루 먹은 똥개 다루듯 하지 마십시오. 대꾸도 않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러나 손이 떨려 담뱃불을 온전하게 댕길 수 없었다.

아예 의절하기로 하고 욕바가지나 퍼부어줄걸.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 변씨에게 형식이가 담뱃불을 댕겨주고 있었다.

그런 사소한 배려에도 변씨는 가슴이 뭉클하는 자식의 애정을 느꼈다.

나도 이젠 늙었는가 보다.

그런데 또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형식이가 잽싸게 수화기를 가로챘다.

한동안 귓속말을 주고 받는가 하였더니, 변씨에게 다짐을 받으려 들었다.

조용히 얘기하시려면, 전화 바꿀게요. 역시 대꾸는 않고 손만 내밀었다.

"자진해서 우리 일행을 떠나려 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아무래도 형님과 식구들 곁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이처럼 미련하게 굴고 있는 까닭을 형님만은 익히 짐작하고 있겠지요. 태호와 승희 그리고 봉환이에게 배운 것이 많습니다.

그동안 저질렀던 내 과실을 되새겨보려 했던 노력으로 봐주십시오. 서울로 가서 딸도 만나보고, 성민주씨도 만났습니다. "

성민주란 이름이 들려오는 순간, 꾹꾹 눌러 참고 있었던 감정이 폭발하고 말았다.

"그 여자 만났으면 며칠 동안 많이 헐떡거렸겠네. 그러지 말고 아예 끼고 살면 몸은 덜 버리네. 구질구질한 인생 살아가는 나한테 빤다고 전화거나? 하긴, 남의 쓸개 뒤집으려면 전화질이 제일이지. 이놈의 전화 칵 까부숴버릴까 보다. "

"이런 말씀 드릴 면목도 없습니다만, 형님 제발 고정하세요. 제가 왜 연고도 없는 예천까지 와서 형님을 찾았겠습니까. 나를 변명해서 식구들을 설득해줄 분은 형님밖엔 없는데, 형님이 이러시면 내가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 있겠습니까. " "형님 소리 작작해. 한선생 아니라도 나보고 형님 아우님 할 사람들 여럿이야. 한선생만 전세내서 지절거리라고 지어둔 형님 아니니깐 이만 전화 끊어. "

"전화는 끊어도 좋습니다만, 식구들 설득해서 예천으로 오십시오. 그동안 내 나름대로 시장조사도 하고 답사도 해봤습니다. " "시장조사 좋아하네. 꼴같잖은 장돌뱅이가 못하는 소리가 없구만. 한선생 언제부터 격식 차려가며 노점상 했나? 갯가에 숭어가 뛰니까 머슴방에 목침이 덩달아 뛴다더니 그짝이구만. 예천에 무슨 횡재수라도 기다리고 있다는 게야? 그런 일이 있으면 한선생 혼자서 이문 챙겨서 성뭐라는 여자하고 마르고 닳도록 붙어 살어. "

"이문을 챙길 수 있다는 예감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형님 말씀대로 우리가 어차피 장돌뱅이라면, 전국 장터를 두루 섭렵하고 물산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장돌뱅이가 해야 할 일이 아닙니까. " "예천이란 곳이 경상도 어디에 있는 고을이야?"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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