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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걷다, 어제를 만나다 ⑤ 인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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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타운에 있는 소위 ‘삼국지 벽’. 거리를 다 걸으면 소설 한 권을 다 읽는 효과가 생긴다.

인천은 한반도의 문(門)이었다. 일본과 서구 열강이 조선 진출을 꾀하던 19세기, 인천은 그들에게 교두보였다. 병인양요나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이 하나같이 인천과 관련이 있는 건 서울로 가는 가장 빠른 길목에 있어서였다. 맥아더 장군이 미 해병대를 이끌고 상륙작전을 감행했던 곳도 인천이었다. 지금도 달라진 건 없다. 하루에도 수만 명이 영종도 국제공항을 거쳐 한반도를 들락거린다.

올해는 인천 방문의 해다. 인천 세계도시축전이 다음 달 7일~10월 25일 송도 신도시 일대에서 열린다. 최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진대제 인천 세계도시축전 조직위원장은 “왜 하필 도시 축제를 여느냐”는 질문에 “근대적 의미의 도시가 최초로 형성된 곳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맞는 말이다. 인천은 무려 41개에 달하는 한국 최초 기록을 보유한 도시다. 그 기록의 대부분은 물론 근대 유물이다. 한국 최초의 근대식 등대인 팔미도 등대(1903년), 서울 파고다공원보다 9년 앞선 자유공원(1888년), 서울 정동 손탁호텔보다 14년 먼저 개장한 대불호텔(1888년) 등 한국의 근대는 인천에서 시작됐다. 자장면도 인천에서 처음 비벼졌고, 최초의 야구 경기도 인천에서 벌어졌다. 경인선 전철 인천역에서 자유공원을 오르는 길은 우리 민족이 처음 경험한 근대를 만나는 일이다.

글=손민호 기자, 사진=조용철 기자

#프롤로그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로 조선은 항구 3개를 연다. 부산과 원산, 그리고 인천이다. 그 후속 조치로 인천엔 1883년 조계지(租界地)란 게 조성된다. 외국인이 자유로이 거주하고 활동할 수 있게끔 조선이 터를 내준 치외법권 지대다. 그때만 해도 한적한 어촌이었던 제물포, 그러니까 지금 이름으로 인천은 그 뒤로 급격한 체질 전환을 겪는다. 일본을 비롯한 서구의 문물은 인천을 통해 이 땅에 상륙한다.

그 시절, 인천엔 중국 산둥 지방에서 건너온 ‘쿠리(苦力)’라 불리는 막일꾼과 부두 노동자가 이미 상륙해 있었다. 그들은 인천의 새로운 지배층이 된 일본인과 수시로 충돌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땅에 금을 긋고 자기네 영역을 확보한다. 그 경계가 지금 공자상이 놓여 있는 계단이다. 공자상을 뒤로 하고 오른편이 지금 차이나타운이 형성된 청국 조계지고, 왼편이 당시 인천 금융을 장악했던 일본 조계지다. 공자상 뒤편, 지금 자유공원이 들어선 응봉산 일대엔 서구인을 위한 공동조계지가 들어선다.

차이나타운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아기자기한 중국상점(맨 왼쪽)과 120년 전통의 내리교회.

#차이나타운을 걷다

인천역 건너편 거리는 온통 붉은 색이다. 한국 유일의 차이나타운이다. 이 골목은 주말마다 관광객으로 미어 터진다. 나즈막한 언덕을 오르니 오른편에 노란 벽의 1층 건물이 나타난다. 의선당, 중국식 사찰이다. 관음보살과 『삼국지』에 등장하는 관운장을 모시고 있다. 옛날엔 여기서 중국 무술을 연마하기도 했단다. 거리 전체에서 풍기는 이국적인 느낌이 왠지 기분이 좋다.

이 골목에서 자장면이 태어났다. ‘공화춘’이란 중국 음식점에서 자장면이 탄생했다는 게 정설이지만, 요즘 이견이 제기되고 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공화춘은 호화 음식점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자장면은 당시 쿠리들이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던 음식이었다. 공화춘이 골목의 명소였다 보니 훗날 자장면의 원조로 알려진 게 아닌가 하는 게 지역 학계의 분석이다. 옛 공화춘 건물은 수리 중이었다. 조만간 이 건물에 자장면 박물관이 들어선단다.

#근대화의 흔적

인천 중구청은 본래 일본 영사관 건물이었다. 광복 이후 인천시청으로 사용되다가 85년 인천시청이 구월동으로 이사 가면서 중구청으로 사용되고 있다. 중구청에서 자유공원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화려한 한옥 건물을 만난다. 지금은 인천시역사자료관으로 쓰이고 있지만, 원래 코노 다케노스케란 일본인 부자의 별장으로 지어졌다. 광복 이후 인천에서 가장 유명한 요정이었고, 66년부터 인천시장 공관으로 사용됐다. 인천시청이 구월동으로 이사 간 다음부터 역사자료관이 됐고, 아기자기하게 꾸민 정원은 시방 결혼사진 촬영 장소로 인기가 좋다. 건물 외향은 한옥이지만 내부 구조는 일본식이다.

답동 사거리 쪽으로 걸어나오면 중동우체국이 보인다. 최초의 지방 우체국이었던 인천분국 건물이다. 여기서 상상력을 발동해 보자. 인천우체국이 개설된 건 1884년이고, 경인철도가 개통한 건 1899년이다. 그럼 그 15년 사이 우편물은 어떻게 배달됐을까. 서울 종로의 우정총국과 인천분국에서 매일 오전 9시마다 직원이 출발해 오후 1시쯤 만나 우편낭을 교환했단다. 그 중간 지점이 지금의 오류동이다.

#자유공원에 올라

자유공원의 원래 이름은 각국공원이었다. 1888년 서양 각국이 공동으로 생활하는 공동조계지 한복판 산꼭대기에 서양 각국은 서로 즐길 수 있는 공원을 만들기로 합의한다. 한국 최초로 서양식 공원이 건립된 것이다. 독일·영국·러시아·미국 등 서양 각국은 그들이 함께 모여 사교를 하는 공간도 함께 만들기로 한다. 자유공원 기슭에 지은 제물포구락부다.

광복 이후 만국공원이라 불리던 공원은 1957년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세우면서 자유공원으로 이름이 바뀐다. 맥아더 장군 동상을 꼼꼼히 본 적 있으신지. 본래 동상은 정면을 응시하게 마련이다. 하나 장군은 10시 방향을 노려보고 있다. 그 시선을 따라가 보니 월미도가 있다. 1950년 9월 15일 미 5해병대가 최초의 상륙작전을 펼친 지역, 작전지도에 ‘그린 비치’로 기록된 곳이다.

#에필로그

근대화의 흔적을 밟는 건, 우리 민족이 얼마나 호되게 당했는지 되새기는 일이다. 그래서 인천의 옛 풍경은 쓰라리다. 근대 한국의 첫 공창(公娼)이자 한때 국내 최대 규모였다는 집성촌 거리도 인천에 있다. 옐로하우스라 불리는 거리. 지금은 숭의동에 있지만, 옐로하우스는 원래 일본 조계지 안에 있었다. 1902년 들어선 일본식 유곽이 그 전신이다. 광복 이후엔 미군이, 그 뒤론 한국인 외항선원이 주로 들락거렸다. 숭의동으로 이전한 건 군사정권 시절인 62년 때 일이다. 인천항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이 유곽은 당시 바닷가 변두리였던 숭의동으로 옮겨졌고, 미군부대에서 얻어온 노란 페인트로 가건물의 외벽을 칠해 옐로하우스란 이름이 생겼다. 올해 안에 재개발 사업이 마무리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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