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제4장 서까래를 치면 기둥이 운다

일찍 잠에서 깨어난 것은 태호였다.

옆자리엔 철규가 곤하게 잠이 들어 있었고, 고즈넉한 숨소리가 날 때마다, 방안엔 술냄새가 서핏하게 고였다.

시계를 보던 태호가 철규를 흔들어 깨웠다.

그는 흡사 방금 태어난 송아지처럼 버둥거리며 상반신을 가누고 일어나 앉았다.

벌써 일곱십니다.

그런 소리를 귓결로 들으면서 철규도 얼른 손목시계를 찾아 팔목에 끼웠다.

버릇처럼 창문을 열고 주차장에 세워둔 용달트럭을 살펴보았다.

운전석의 앞유리를 걸레질 하고 있는 승희의 모습이 창 아래 멀리로 바라보였다.

그들은 여관을 나섰다.

아침은 북평장터에서 먹읍시다.

태호가 운전석으로 오르며 말했다.

고속도로로 들어서고 나서야 태호는 두 사람을 힐끗하며 물었다.

"어젯밤엔 두 분이 같이 술 드셨군요. 대선배 동행 않아서 술냄새만은 모면했다 싶었는데…. 이럴줄 알았으면 여관 앞에서 곰치국으로 해장하고 올걸 잘못했죠?" "너 지금 빈정거리는거야? 아니면, 술마신 사람들 속 쓰린 사정을 깊이 헤아려서 하는 소리야?"

"물론 두 가지 다죠. 나도 어엿한 한씨네 행중 식구니까요. 물론 두 분만 마셨다 해서 엉뚱한 오해는 않고 있습니다만 봉환이형이 알면 기분 좋지는 않겠죠? 선배님은 그런 안목이나 염치쯤은 헤아릴 줄 아실테니까. 술 한 컵을 나누는 좌석이라 하더라도 좌상인 선배가 신중하셔야죠. " 농담처럼 시작한 대화에 가시가 돋기 시작했다.

태호는 차창 앞만 뚫어져라 바라보며 차를 몰고 있었다.

자동차는 넓은 대로에 희뿌옇게 밀려드는 해무를 걷어차며 기세 좋게 달리고 있었다.

태호는 긴장하면, 구태여 얼굴을 숙이지 않아도 양미간에 주름이 잡히곤 하였다.

지금이 바로 그런 얼굴이었다.

"선배 입에서 통감자라는 별명이 수시로 흘러나오는 것에 놀랐습니다.

선배와 나 때문에 봉환이형이 애꿎은 병원 신세를 지고 있지 않습니까. 멧돼지처럼 펄펄 뛰며 살던 사람이 얼마나 고역을 치렀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봉환이형 앞에서는 얼굴을 들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봉환이형은 누굴 탓하거나 원망한 적이 한 번도 없었죠. 봉환이 형은 진국입니다. 형을 실망시키지 않게 하세요. 제 간절한 바람이기도 합니다."

운전석 안은 차창을 스치는 바람소리만 고즈넉할 뿐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세 사람은 뚫어져라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후사경을 마주 바라보고 있는 승희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목에 두른 수건으로 얼른 눈시울을 닦아냈다.형을 실망시키지 않게 하세요. 제 간절한 바람이기도 하다는 태호의 말이 바늘끝처럼 아프게 가슴을 찔렀다.

물론 요즘 들어 그들 일행을 괴롭혀 왔던 모든 사건의 발단은 근본적으로 태호로부터 비롯된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건들은 태호에겐 봉환의 정체를 깊이 있게 관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었지만 그러나 다른 일행들은 그 사건에 편승하여 잇속을 챙기려 들었거나 품격을 갖추지 못한 가벼운 코미디 따위로 호도하려는 인식들도 없지는 않았다.

특히 그런 병고를 치르고 있는 봉환의 별명을 스스럼없이 부르곤 하였던 철규의 허물은 더욱 뚜렷하게 남았다.

"내가 신중하지 못했어. 경망스러웠지. 용서해. 다음부턴 그런 일 없을거야. " "형수님은 어떠세요?" "난 잘 모르겠어요. 자신 있는 대답은 할 수가 없어요. "

"형수님 심정도 이해해요. 지금 당장 무슨 담판을 짓자는 것도 아니니까요. 다만 봉환이형의 가치를 평가절하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죠. 우리 아니면 누가 형을 위하겠습니까. 전쟁 때문은 아니지만, 형도 고아란 얘기를 들었어요. 먼 친척들조차 없다니까요. "

(김주영 대하소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