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읽기 BOOK] 책 속에서 뛰쳐나와! 그건 진짜 체험이 아니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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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커버 투 커버 - 책 읽는 여자
로버트 크레이그 지음, 나선숙 옮김
문학수첩, 448쪽, 1만2000원

그에게 책은 안온한 곳이었다. 책은 그에게 무한한 세계를 펼쳐 놓았고 그가 상처받지 않고 탐닉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스물아홉의 카드 디자이너인 주인공 타냐는 남자 친구와 함께 보내는 휴일보다 그를 사로잡은 책을 읽고, 그를 매혹할 책을 사러 가길 즐긴다.

그는 “여러 남자를 사귀어 봤지만 하나같이 너무 날카롭거나 너무 가난하거나 한심할 정도로 지루할 뿐”이라고 말한다. 남자 친구는 섹스를 위한 존재일 뿐이다. 때문에 결혼이라는 지상 과제를 향해 남자 사냥에 목 매지 않는다. 책 사냥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서른을 목전에 둔 타냐의 삶은 그의 말대로 만족스럽게 보인다. 하지만 삶에는 늘 예기치 않은 광풍이 있는 법. 타냐의 일상은 헌책방에서 산 책 『가짜 종이꽃가루』때문에 송두리째 흔들린다. 저자의 이름이 자신과 같은 ‘타냐 스티븐스’라는 이유로 펼쳐든 그 책의 첫 장은 그를 기함하게 한다. 그 책이 자신의 과거와 현재·미래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읽을 수 있다면 빠져들지 않겠는가.

타냐는 그 책 때문에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직시하게 된다. 추억은 늘 아름답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건 그 순간들이 정말 아름다웠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왜곡된 기억에 의존하는 탓이 크다. 주인공의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에두르지 않고, 왜곡되지 않은 사건의 실상은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든다.

특히 그녀가 유일한 사랑이라고 여긴 첫사랑 마틴과의 이야기는 타냐를 수렁으로 빠뜨린다. 마틴과의 이별, 재회로 이어지는 일련의 이야기 속에 휘청대면서 타냐는 깨닫는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받고 실망하기 싫어 책을 읽는 데 빠져들었음을.

그럼에도 타냐는 자신의 미래가 쓰인 『가짜 종이꽃가루』의 내용에 집착해 새롭게 다가온 사랑을 떠나보내려 한다. 또 다시 책 뒤로 숨어들며 혼자임을 택하려 하자 타냐의 새 남자친구는 그 책을 태워버린다. 목숨만큼 소중한 책이 타들어가는 모습에 분노하는 타냐에게 이렇게 말한다. “타냐, 나도 당신처럼 책 읽는 즐거움을 알아요. 하지만 ‘체험’하는 만큼의 기쁨은 아니에요. 진짜 사랑, 진짜 두려움, 진짜 분노, 진짜 기쁨이 아니란 말이에요. 책 읽는 건 구경이에요. 나랑 같이 있으면 사랑과 기쁨을 느끼게 해 줄게요. 분노와 슬픔도”라고. 그리고 타냐도 자신의 손에 들고 있던 마지막 책을 불길 속으로 던

져 버린다.

간접 경험보다는 직접 경험을 위해서 성큼 한발짝 내디딘 것이다. 칙릿을 표방했지만 생각할 꺼리가 있는 소설이다.

하현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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