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또 밀려서 하는 司正?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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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개혁을 표방하는 어느 정권에나 사정 (司正) 은 개혁의 중요한 실질 (實質) 이자 수단이다.

사정의 공정성에 따라 정권의 도덕성은 강도가 달라진다.

김영삼정권은 사정의 무게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편의적으로 그 칼을 휘둘러 개혁의 설득력을 훼손했다는 역사적 비판을 받고 있다.

현정권에도 사정이 역시 중요한 시험으로 다가오고 있다.

정치권 사정은 특히 어려운 시험과목이다.

정치자금과 비리자금의 경계가 모호한 때가 있는데다 경제에 주는 충격같은 것을 고려하면 정경 (政經) 비리의혹을 일반 잡범 다루듯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정치권이라 해서 풍겨져나오는 비리의 냄새를 덮을 수도 없다.

또 정권으로선 비리가 여권과 연결되기라도 하면 읍참마속 (泣斬馬謖) 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

경성특혜대출사건 진상규명에 대한 여론이 비등하자 청와대.여권과 검찰은 뒤늦게 철저한 수사의 방침을 밝혔다.

경성뿐만 아니라 여권은 기아.청구.개인휴대통신 (PCS) 사업자선정.종금사 인허가 관련사건과 한국컴퓨터게임산업중앙회 로비사건 등에 있어서도 정치권 비리의혹을 규명하겠다고 나섰다.

이러한 천명이 용두사미가 되지 않는다면 한국사회는 당분간 또 한차례 사정의 혼란과 충격을 견뎌내야 하게 됐다.

한보사건에서 보듯 정경유착비리는 나라를 위기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주범이자 고질 (痼疾) 이다.

때문에 정권이 개혁차원에서 이를 파헤치는 것은 사회가 충격의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치러내야 하는 대의 (大義) 다.

원칙적으로 이는 옳은 방향이다. 사정의 대의와 실리를 지켜내려면 정부는 몇가지를 유념해야 한다.

먼저 스스로 언명하듯 여야의 차별이 없어야 하고 정치성이나 표적성이 끼어들어선 안된다.

검찰이 경성사건을 미적지근하게 처리한 것은 의혹관련자 대부분이 여권정치인이기 때문이라는 항간의 의심을 사정담당자들은 이제라도 신경써야 한다.

정부는 사정개혁의 정신을 스스로 타락시켜서는 안된다.

개혁을 위해 사정한다고 해놓고, 들리는 것처럼 권노갑.홍인길씨 등 한보관련 인사들을 슬그머니 8.15사면에 끼워 넣는다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개혁인가.

정치사정은 방법의 지혜도 중요하다.

이권개입비리는 엄단해야 하지만 단순한 정치자금을 구별하지 않으면 사정은 부 (負) 의 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

그리고 사정은 모름지기 일상적으로 조용하고 끈기있게 진행돼야 한다.

한보때처럼 정치적인 목적에 따라 일부 리스트가 춤을 춘다면 사정의 공정성은 흔들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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