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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를 열며]안팎의 영웅 알아보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사람들은 박세리에게 푹 빠져 있다.

그녀에게 훈장을 주고 싶어하는 정부는 급수를 정하는 데 어려움을 토로한다. 1급 훈장을 주고 싶은데, 그렇게 되면 훗날 나라의 명예를 세계에 떨치는 더 큰 공을 세웠을 때 주어야 할 더 높은 급수가 없기 때문이란다.

또 서슴없이 그녀를 영웅이라고 부르는 이도 많다.

단어의 사용 여부에 관계없이 사람들은 그녀를 영웅처럼 생각한다.

박세리가 뜨기 전에는 박찬호와 이창호가 있었다.

분야에 따라 국민적 인기를 누린 다른 이들도 많겠지만 저 이름들이 먼저 떠오를 뿐이다.

박찬호는 미국의 큰 야구장에서 공 던지는 모습을 텔레비전으로 보여주어서 국민이 자부심을 가지게 했고, 이창호는 과거에 일본의 꽁무니만을 따라다니던 한국 바둑을 세계 제일로 높여 놓았다.

왜 우리는 박세리와 이창호를 좋아하는가.

저들이 시합에서 이겼기 때문에? 물론 이기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저렇게 이길 수 있을 때까지, 자기를 죽이고 자기를 이긴 불굴의 의지력과 피나는 노력이다.

지옥훈련을 받아온 박세리는 시합에 출전할 때가 더 편하다고 한다.

그때는 연습량이 적어지기 때문이다.

이창호는 이긴 바둑의 경우에는 상대의 패인을 찾으면서 한두 번만 복기를 하지만, 진 바둑의 경우에는 밤을 새워가며 자신의 패착수와 그 교정수를 찾을 때까지 무수히 복기를 반복하면서 연구한다고 한다.

나는 며칠 전 분당의 중앙천을 따라 조성된 자전거도로에서 새벽운동을 하던 중에 놀라운 장면을 보았다.

초등학교 저학년쯤으로 보이는 어린이들 대 여섯명이 스케이트 타는 동작 훈련을 받고 있는 듯했는데, 그 중에 두명이 울음을 참으면서 연습하는 것이었다. 8~9세의 어린이가 새벽 6시쯤에 운동장에 나온 것이나, 교사의 지시에 절대 복종하면서 제대로 울지도 못하는 것이 신기하게 생각됐다.

그것을 보면서 복싱 시합에서 패한 한 학생을 땅 속에 묻은 사건이 생각났다. 제주도의 한 고교 교사는 승부근성을 기르기 위해서 그런 방법을 썼다고 한다.

세계 제일 뒤에는 반드시 저와 같은, 아니 보통 사람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엄청나게 높은 강도의 훈련과정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일등은 오직 하나뿐이다. 노력한다고 해서 누구나 일등이 될 수는 없다. 최선을 다하고도 우승하지 못하는 이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또 항상 이길 수는 없다. 한때에는 이기지만 다른 때에는 질 수도 있다.

차범근 감독의 오르내림을 보라.

또 공치기의 승자가 인생의 승자는 아니다.

바둑은 인생과 유사하다고 한다. 큰자리, 먼저 두어야 할 자리, 수순, 형세 등의 판단은 인생에도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둑 9단이 그대로 인생의 9단은 아니다.

바둑의 수와 그것을 인생사에 응용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초급의 어린이가 9급의 어른보다 더 사려 깊을 수는 없다.

세계 최강자라고 하더라도 그는 오직 자기 분야에서의 영웅일 뿐이다.

그러면 인생에 있어서의 영웅은 누구인가.

그는 무상한 세상을 살아야 하는 존재의 실상을 여실히 보고 자기 속에서 평화와 즐거움을 발견한 사람이다. 명예나 인기에 기대어서 행복을 발견하려는 것은 마치 빚을 얻어 쓰면서 부자 행세를 하려는 것과 같다.

저것들은 반드시 돌려주어야 한다.

내가 남들이 부르던 노래를 몰아내려고 한 나훈아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서태지가 나타나서 내 노래를 몰아내려 할 것이다.

남이 아닌 자기를 살면 그곳에 어느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승리가 있다.

나의 승리는 남의 것과 비교되지 않기 때문에 뒤집어질 일이 없다.

한 바둑 학원은 이런 광고를 냈다.

IMF 시대를 잘 살려면 책.바둑.자전거와 친해지라고 말이다.

그럴 듯하다. 특히 자전거가 맘에 든다.

휘발유에 의지하지 않고 힘껏 속도를 내거나 멀리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하면 금상첨화일 것 같다.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는 공부다.

마음은 드넓은 세상을 축소해서 나에게 비춰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속의 내적 영웅을 찾는다고 해서, 저 역사 위에 우뚝 선 외적 영웅 박세리나 이창호에게 보내는 박수 소리가 작아지는 것은 아니다.

인생의 참 의미를 알면 저들이 계속해서 이기지 못하더라도 여전히 좋아하고 찬탄할 수 있다. 그리고 일등 이외의 모든 사람들도 빠짐없이 영웅으로 대할 수가 있다.

석지명(청계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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