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글로벌 아이

김칫국부터 마시는 '안티 부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정치와 종교는 화제에서 멀어질수록 좋다." 미국 사회의 불문율이다. 그래서 처음 만나는 사이라면 날씨 얘기를 하고, 이어 전날 TV에서 본 야구 경기 얘기를 하며,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새로 나온 잔디 깎는 기계 얘기를 한다.

하지만 선거 열기 때문일까.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정치 얘기를 꺼내는 새로운 미국인들을 종종 보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현직 대통령인 조지 W 부시를 끔찍이 싫어하는 사람들이다. 부시가 재선되는 꼴은 절대 못 본다며 전의를 다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영화 '화씨 9.11'을 보면서 박수를 보내며 열광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부시 진영에서 보면 확신범들이다.

'안티 부시'의 목소리가 워낙 높다 보니 이러다 아들 부시도 아버지 부시의 전철을 밟아 재선에 실패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부시를 지지하는 쪽 사람들은 정치를 화제로 삼지 않는다는 불문율에 충실한 것일 뿐일 수 있다. 한쪽 분위기만 보고'굿바이 부시'를 예감하다가는'희망적 예측'의 오류에 빠질 수 있다.

민주주의가 상대적으로 가장 잘 구현되고 있다는 미국에서도 현직 대통령의 프리미엄은 상당하다. 미국에서 양당제가 뿌리내린 남북전쟁 이후, 즉 에이브러햄 링컨부터 빌 클린턴까지 27명의 대통령 중 본인이 희망했는데도 재선에 실패한 사람은 7명에 불과하다. 그중 1888년 재선에 실패한 민주당의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다음 대선에 재도전, 현직이던 공화당의 벤저민 해리슨을 꺾어 권토중래에 성공했다. 따라서 재선 실패로 단정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다. 또 1976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지미 카터에게 패한 공화당의 제럴드 포드는 리처드 닉슨의 사임으로 대통령직을 물려받았지만 선거로 뽑힌 부통령 출신이 아니라는 점에서 현직의 재선 실패로 분류할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따라서 엄격한 의미에서 양당제하에서 재선을 노렸지만 실패한 사례는 해리슨, 윌리엄 태프트, 허버트 후버, 카터, 조지 부시 등 5명뿐이라는 것이다.

'전쟁 중에는 말을 갈아타지 않는다'는 고전적 상식도 부시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테러와의 전쟁'을 내세워 부시는 "스테이 더 코스"(현상유지)를 외치며 유권자들의 혼란 회피 심리를 파고들고 있다. 오늘부터 보스턴에서 열리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후보 지명을 공식 수락하게 될 존 케리를 지지하는 표 중에는 케리를 좋아해서라기보다 부시가 싫어서인 경우가 많다. 당연히 충성심과 결집력이 약하다. 이런 상황에서 이라크나 국내 경제에서 극적인 상황 악화가 없는 한 케리가 부시를 꺾기는 어렵다는 전망이 미 정치분석 전문가들 사이에 지배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곳곳에서 이번 미 대선과 관련한 희망적 예측이 만연하고 있다. 한반도도 예외가 아니다. 부시의 낙선을 기정사실화하며 이라크 추가 파병 연기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가 하면 6자회담의 장래를 부시의 낙선 가능성과 연결짓는 시각도 있다. 부시의 재선 실패 전망과 남북 정상회담을 연계하는 움직임도 감지되고 있다. 그러나 부시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세계 여론이 아니라 미 국민이다. 그것도 미 국민 일부가 아니라 전체의 선택이다. 희망 때문에 예측이 왜곡돼서는 안 된다. 희망은 희망이고 예측은 예측이다. 김칫국부터 마시는 우를 범하지 않으려면 부시의 재선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 싫더라도 함께 지내는 방법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부시가 미국은 아니기 때문이다.

배명복 특파원 워싱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