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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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제4장 서까래를 치면 기둥이 운다

한 주먹 쥐어박힌 기분이었다.

자칫 허튼소리를 늘어놓았다간 큰코 다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민이가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닮은 것이라면, 철규와 정민이가 서로 오랜만의 해후를 한다 하더라도 아버지의 역할에 새로운 계기가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처음 정민이가 식당에 나타났을 때, 승희는 무작정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정민이가 주문진까지 혼자서 아버지를 찾아올 적에는 필경 목적이 있을 것이고, 그 목적은 바로 철규의 서울행을 유인하거나 강요하는 것이라는 지레짐작 때문이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인 정민에게 자신의 존재를 아버지와 연결시켜 의심받을 수 있다는 위험까지 감내하면서도 정민을 대접하고 있는 것은 바로 정민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직설적으로 그런 질문을 던지기엔 정민은 너무 예민하고 영악해 보였다.

승희가 보기에 한철규는 한번 결심한 일은 모순이 있더라도 바꾸지 않는 미련한 뚝심이나 옹고집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게다가 듬직하게 생긴 허우대와는 달리 심성조차 여린 사람이었다.

딸이 울고 불고 매달리면 충분히 흔들릴 수 있는 남자였다.

그러나 정민은 또한 이성적으로도 세련되어 있어서 막무가내로 매달리는 것도 폭력이라는 것을 이미 깨닫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민은 그처럼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상반된 인상이 뚜렷하게 혼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승희도 혼돈스러웠다.

결국은 정민의 입에서 꼬투리가 잡힐 만한 말이 흘러나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얼추 정민을 대처할 윤곽을 잡은 승희는 곧장 가게로 돌아가지 않고 가로등이 드문드문 들어서서 그다지 어둡지 않은 방파제를 걷자고 제의했다.

승희로서는 속으로만 굴릴 수밖에 없었던 직설적인 질문이 정민의 입에서 굴러나온 것은, 방파제를 반쯤 걸어갔을 때였다.

"아줌마 아빠하고 친한 사이죠?" 조숙한 편이라는 평판 듣기를 좋아하는 아이들의 언어는 수사적인 치레에 익숙하게 버릇들여진 어른들을 곧잘 당혹으로 빠뜨린다.

혹시나 해서 묻는다든지 죄송한 말씀이지만요 하고 덧붙이는 수사들이 언뜻 보면 군더더기에 불과한 것 같지만 상대방으로 하여금 순간적으로나마 말을 조리있게 조합할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한다.

영악한 아이들의 질문은 그래서 한결 공격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직설적이고 공격적인 것만치 손쉽게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도 많은 것이었다.

"우린 싫어도 친하게 지낼 수밖에 없어. 아까 말했었지. 우리는 종잣돈을 같이 모았던 동업자들이라고. " "동업자들이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것쯤은 저도 알아요. 제가 묻는 건 그게 아녜요. "

"물론 나도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이상의 대답을 할 수 없어 안됐네. 그런데 어째서 내가 그런 의심을 받게 됐을까?" "아저씨가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다는데, 저를 너무 극진히 대해주니까요. " "사람의 진심을 오해하면 못써. "

"아빠가 집에 있을 때…. 엄마하고 육박전을 벌이진 않았지만, 걸핏하면 서로 헐뜯고 다퉜어요. 그래서 저도 덩달아 성격이 비뚤어졌는가 봐요. 요사인 두 분이 다툴 일도 없어졌지만요…. 그래선지 누가 친절하게 대해주면 별로 고맙다는 생각을 못해요. 오히려 화가 날 때도 있다니깐요. 우리집을 흉보려고 그러는 것 같거든요. 아이 추워. 오늘 밤엔 병원에 안 가셔도 돼요?"

"마침 듬직한 간병인을 두었으니까, 오늘 밤은 가게에서 정민이하고 지내기로 했지. 방이 그다지 비좁지는 않으니까, 같이 잘까?" 정민이가 고개를 끄덕인 지점에서 그들은 다시 선착장 쪽으로 돌아섰다.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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