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사교육 대책이 미덥지 못한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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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물론 커다란 개혁을 하자면 여러 정책 당사자들의 의견이 다를 수 있고, 이견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부작용이 최소화되도록 다듬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작금의 사교육비 경감 대책의 논의 과정은 이러한 차원을 넘어 좀 더 근본적인 문제점을 노정하고 있다. 첫째는 실효성의 문제다. 예를 들어 대입수능시험 응시과목 축소는 학생들의 수험부담을 줄여주면 사교육도 줄어들 것이라는 단순한 논리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사교육은 다른 학생과의 경쟁에서 앞서는 것이 목적이므로 오히려 응시과목에서의 사교육이 늘어 전체적인 사교육 수요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반박논리도 만만치 않다. 특히 제시된 안대로 사회탐구와 과학탐구를 4과목에서 2과목으로 줄이면 국어·영어·수학 등 소위 도구과목의 비중이 더욱 높아져 이에 대한 과외가 극성을 부릴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그렇지 않아도 역사(세계사·국사)나 물리같이 대학에서의 공부에 필수적인 과목이 어렵다는 이유로 기피되고 있는데, 앞으로 사회와 과학의 응시과목 수를 줄이면 이런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결국 과거처럼 국영수 위주의 획일화된 공부 패턴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있는 것이다.

둘째는 ‘자율과 책임’ 위주의 교육을 추구한다는 철학에 배치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제시된 대책들을 보면 대부분 대학이나 고등학교의 선택권을 제한하는 것으로 과거 권위주의 정권에서의 정책을 생각나게 한다. 물론 사교육의 폐해가 너무 극심해 사회 안정성을 해칠 정도라고 판단되면 우선 대증적인 요법을 쓸 수도 있다. 환자의 열이 너무 높으면 그 원인에 관계없이 우선 해열제를 처방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해열제 처방만 남발하고 고열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치료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는다면 환자나 가족은 의사에 대한 신뢰를 거둘 것이다. 게다가 해열제 처방의 효과마저 불분명하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지금 정부·여당의 사교육 대책이 이런 꼴이다. 교육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교육주체들의 자율과 책임에 의해 풀어야 할 텐데, 장기적인 로드맵은 없고 단기적이고 임기응변적인 대책만 난무하니 도무지 신뢰가 가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중·고교 내신성적의 절대평가 전환 문제를 보자. 현재의 상대평가가 동료 학생들 간의 경쟁만을 부추겨 협동심이 없어지는 등 교육적인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런 대책 없이 절대평가로 전환하면 과거에 성행하던 성적 부풀리기가 반복될 것이라는 점 또한 명백하다. 그리되면 대학은 내신성적을 입시 전형요소에서 최소화하려 할 것이고, 고등학교 공교육은 다시 껍데기만 남을 것이다. 결국 문제가 해결되려면 대학과 고교 간의 신뢰가 구축돼 대학은 고교의 내신 성적을 믿고 고교는 객관성 있는 자료를 대학에 제출하는 구조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해결책은 얼핏 이상주의자의 탁상공론처럼 비칠 수도 있으나, 과거 1930년대 미국에서는 대학과 고등학교가 8년간의 연구 끝에 서로 협약을 맺어 지금과 같은 입학사정관제도의 근간을 만든 바 있다. 우리도 대학과 고등학교, 학부모 등 이해당사자들이 모여 진지하게 논의한다면 커다란 사회적 합의를 이루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단기적 성과가 필요해 대증적 요법을 써야 한다면 그 실효성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라. 그리고 이와 함께 자율과 책임에 기초한 장기적인 로드맵을 제시하고 꾸준히 추진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정부의 정책에 신뢰성이 생길 것이다.

오세정 서울대 교수·물리학
◆약력=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미 스탠퍼드대 물리학 박사, 국가교육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