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펑의 외교 “左右 구별은 하되 가리지는 마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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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호 33면

54년 6월 제네바의 중국 대표단 숙소 정원에서 왕자샹(王稼祥)·왕빙난(王炳南)·장원톈(張聞天)·리커눙(李克農) 등과 망중한을 즐기는 저우언라이(왼쪽 세번째). 김명호 제공

1954년 4월 26일부터 7월 21일까지 한반도와 월남 문제를 다루기 위한 회의가 제네바에서 열렸다. 48년 동서 냉전이 시작된 이후 23개국의 대표들이 최초로 한자리에 모인 대형 국제회의였다. 20세기의 전설적 인물들이 각국을 대표해 총출동했다. 공산정권 수립 후 국제무대에 처음 등장하는 중국은 저우언라이(周恩來)를 필두로 185명의 대표단과 기자 29명을 파견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20>

황화(黃華)와 함께 대표단 대변인으로 선정된 궁펑은 군사위원회 정보부장 리커눙(李克農)과 함께 한반도와 월남에 관한 자료집을 만들어 대표단의 중요 인물과 우방에 전달했다. 1700여만 자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었다.

제네바로 향하기 2개월 전 저우언라이는 대표들에게 “한반도 문제는 해결이 쉽지 않다. 하는 데까지 해 보는 수밖에 없다. 월남 문제는 해 볼 만하다. 프랑스는 화해를 원하지만 미국은 그럴 생각이 없다. 프랑스로부터 월남 내의 군사지휘권을 탈취하려 하지만 프랑스는 미국이 월남에 발을 들여놓기를 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프랑스를 같은 편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54년 5월 중순 프랑스 부녀 대표단과 회견하는 궁펑(오른쪽 첫번째).

회의 시작 11일 만인 5월 7일 프랑스군이 월남군에 대패했다. 프랑스는 화의에 나섰다. 프랑스의 부녀 대표단은 분쟁이 재발할 것을 우려했다. 중국 대표단이 적극적으로 정전과 평화회담 개최를 촉구해 주기를 희망했다. 궁펑은 저우언라이의 대리인 자격으로 프랑스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제네바 회의는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상황이 발생하는 등 파열을 예고했지만 참가자들은 자국의 입장을 국제사회에 확인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궁펑은 저우언라이의 발언이 있을 때마다 300여 명의 기자를 초청해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개인 일정을 흘려 기자들의 흥미를 자극시켰다. 찰리 채플린의 예방과 프랑스 총리와의 회담 모습이 전 세계의 유명 일간지에 대문짝만 하게 실리곤 했다. ‘비적 출신들이 대륙을 장악했다’는 생각이 지배적일 때였지만 중국 외교관들의 세련된 행동은 화제를 몰고 다니기에 충분했다.

궁펑은 60년 제2차 제네바회담에도 대표단 고문 겸 수석대변인으로 참석했다. 저우언라이와 함께 14개국을 순방하는 등 공공장소에 출현하는 횟수가 빈번했지만 항상 침착하고 신중했다. 저우는 그를 볼 때마다 “나이를 먹을수록 단정하기가 처녀와 같다”며 흐뭇해했다.

문화혁명이 시작되자 자살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험한 세상을 꾸역꾸역 살아온 까닭에 언제 뭐가 튀어나올지 몰랐다. 강물에 뛰어들고, 우물에 몸을 던지고, 수면제를 동전 모으듯 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궁펑은 “시골에 내려가 나는 역사를 가르치고 아빠는 외국어 교사를 하면 된다”며 자녀들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공중변소 청소로 하루를 시작했고 일과 후에는 연일 조반파들에게 혹독한 신문을 받았다. 저우는 특유의 방법으로 궁펑을 감쌌다. 꾀죄죄한 모습으로 맨 뒤쪽 구석에 앉아 있는 것을 보자 “궁펑, 앞으로 나와. 비판 대상도 아니면서”라며 큰 소리로 외쳤다.

70년 이른 봄 30년간 누적된 과로가 궁펑을 엄습했다. 한밤중에 뇌출혈로 쓰러졌다. 정신없어 하는 차오관화를 대신해 저우언라이가 수술을 결정했다. 저우는 북한 방문 이틀 전에도 병원을 찾아왔다. 의식 없는 궁펑의 맥박을 짚어 보겠다며 조심스럽게 손목을 잡더니 허망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귀국 후 다시 병원을 찾았을 때는 “궁펑의 이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너무 힘들다. 다시는 보러 오지 않겠다”며 병실을 떠났다.

저우언라이는 궁펑의 영결식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보는 사람마다 붙잡고 “궁펑이 세상을 떠났다”며 헐렁한 군복을 입은 궁펑의 모습을 그리워했다.

궁펑은 저우언라이와 함께 중국 외교의 기틀을 닦았다. “외교는 선전이다. 천편일률적이어서는 안 된다. 좌와 우를 구별해야 하지만 가릴 필요는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일거일동도 저우와 흡사했다.

71년 11월 차오관화가 유엔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했을 때 궁펑의 그림자가 그를 감싸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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