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대기자의 투데이]하시모토 퇴출이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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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선거는 유권자들이 투표를 통해 분명한 의사표시를 해야 제구실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 유권자들은 지난주말 참의원선거에서 투표다운 투표를 했다.

경제실정 (失政) 의 책임을 물어 자민당 (自民黨) 의 하시모토 류타로 (橋本龍太郎) 총리에게 통쾌한 레드 카드를 들었다.

잘된 일이다. 국민들은 의식주 (衣食住)에서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면 정부.여당에 등을 돌린다. 국제통화기금 (IMF) 사태아래 치른 한국의 대선에서 헌정사상 처음으로 야당이 집권하는 쪽으로 정권이 바뀐 것도 생활을 위협받은 유권자들이 여당에 책임을 물은 것이다.

미국에서도 걸프전의 영웅 조지 부시가 92년 대선에서 현직의 결정적 이점을 가지고도 클린턴에게 패배한 것은 경제불황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지금 장기불황의 터널에 갇혀 있다.

97년 일본경제는 성장률 마이너스 0.7%, 실업률 4%를 기록했다.

정부가 미국의 지원아래 외환시장에 개입해도 엔화가치는 회복되지 않고 있다.

하시모토 정부는 선거기간중 경기대책으로 소득세와 주민세를 낮추는 영구감세안 (減稅案) 과 부실채권을 정리하고 금융기관의 구조를 개혁하는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했지만 유권자들을 감동시키지 못했다.

유권자들의 심판은 경기대책이 너무 늦게 나왔다거나 4조엔 정도의 감세로는 내수 (內需) 를 자극하기에 역부족이라는 데 내려진 게 아닌 것 같다.

그것보다는 자민당정권의 경제운용능력 자체를 불신한 것이다.

특히 하시모토 정부가 97년 봄 소비세를 3%에서 5%로 올려 국민들에게 9조엔의 추가부담을 주고 내수를 위축시킨 것은 용서받지 못할 악수 (惡手) 였다.

일본 유권자들은 정치권에 두 갈래의 메시지를 보냈다.

하나는 중의원 (衆議院)에서 과반수 의석을 갖고 있는 자민당에 참의원 장악까지 허용하지는 않겠다는 엄중한 징벌이고, 다른 하나는 야당에 경제개혁의 내용을 강화하고 템포를 빨리 하도록 정부를 닦달하는 힘을 실어준 것이다.

야당, 특히 민주당은 유권자들의 이런 무드를 타고 자민당정부에 경제개혁을 수행할 능력이 없으니 중의원을 해산하고 선거를 다시 하자는 정치공세를 시작했다.

그러나 자민당은 총리의 퇴진으로 여론의 불만과 야당 정치공세의 예봉을 피하면서 계속 집권할 생각이다.

다음 총리로 가장 유력해 보이는 오부치 게이조 (小淵惠三) 외상은 다나카 (田中) - 다케시타 (竹下) 파벌의 대종 (大宗) 을 잇고 있다.

그는 두가지 약점을 갖고 있다.

우선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는 리더십이 없다.

그리고 경제가 가장 중요한 현안인데 오부치는 경제에 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자파 (自派) 의 하시모토가 실정 (失政) 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마당에 계파의 보스인 그가 총리가 된다는 것도 정치도의상 부담이 된다.

그러나 총리는 능력위주로만 뽑는 것이 아니다.

경제통이라는 가지야마 세이로쿠 (梶山靜六) 전관방장관과 미야자와 기이치 (宮澤喜一) 전총리, 그리고 젊은 의원 몇사람들의 이름도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누가 총리가 돼도 그것이 자민당정권인 한 하시모토 내각이 착수한 경제개혁의 궤도를 벗어나지는 않을 것같아 걱정이다.

우리의 간절한 희망은 일본의 정치공백이 오래 가지 않는 것이다.

새 정권은 개혁을 우물거리던 하시모토의 그늘을 벗어나 더욱 과감한 개혁에 총력을 쏟아야 한다.

일본경제가 살아야 아시아 경제가 산다.

1993년 자민당의 장기집권이 일단 막을 내린 이후 거듭되는 정치혼란도 가닥을 잡아 수습돼야 한다.

정치공백으로 경제회생이 늦어지면 이웃나라들이 피해를 보고, 정치가 불안하면 정치인들은 대중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인기정치 (populism) 의 유혹에 빠진다.

일본에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총리후보가 없는 것은 일본과 아시아 모두의 불행이다.

(김영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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