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IMF 위기와 협력적 노사관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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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본격적 구조조정국면에 돌입하면서 노사정 (勞使政) 관계가 불안정상태에 휩싸이고 있다.

은행퇴출을 계기로 기업들의 대규모 구조조정이 임박함에 따라 해고위험에 직면한 노동계가 총파업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시장이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노사관계 개혁을 목표로 출범한 제2기 노사정위는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다.

이것은 구조조정을 신속하고 차질없이 수행하기 위해서는 노사간의 합의를 기다릴 시간이 없다는 경제논리에서 비롯된 것인데, 국제통화기금 (IMF) 관리아래 놓인 경제위기를 생각하면 이해가 가지 않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이는 민주적 방법으로 노사관계를 풀어가기 위해 노사정위를 설치한 국민의 정부 노동정책의 기본정신과 상응하지 않는다.

민주주의 아래에서 국가 - 노동관계는 경제적인 문제인 것만큼이나 정치적인 문제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지난 시기 노동문제는 항상 성장논리에 밀려 권위주의적 방법으로 처리됨으로써 대립적 노사관계가 일상화돼 왔다.

그 결과 지금에 와서는 지난날과 같이 노동을 배제하고 억압하는 것이 이를 제도권내로 끌어들여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보다 값비싼 비용을 치러야 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경제논리를 들어 노동의 포용을 지연시키기보다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이를 서둘러 제도화하는 것이 필요해졌다.

노사정위의 존립근거는 여기에 있다.

즉 노사정위는 당면한 구조조정국면에서 불가피하게 가중될 노동자들의 고통을 보상할 수 있는 방법들을 협의하고 노동정책 전반에 걸친 노동의 참여를 제고하는 제도적 채널로 작용해야 하는 것이다.

시장논리에 따르면 노동의 조직화는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가로막고 구조조정을 추진하는 데 걸림돌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노사의 의견을 조율하고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은 수많은 논란과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책당국자들이나 기업대표들은 실업의 고통에 따른 노동의 동의를 구하기보다는 목전의 목표달성을 위해 편의주의적으로 노동문제를 다룰 경우 값비싼 대가를 치를 가능성이 있음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김영삼 (金泳三) 정부의 노동정책이 실패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김영삼정부는 노사관계개혁위원회를 설치해 수개월간 노사간의 이견을 조율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법개정을 추진했다가 대규모적인 저항에 직면한 바 있다.

결국 그것은 정권의 몰락을 가져온 계기가 됐다.

노동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실업대책, 직업훈련체제, 일반적 복지의 강화 등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고용정책을 펴는 동시에, 노동자들의 고통을 정치영역에서의 양보를 통해 보상하는 정치적 교환의 방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실업을 유발하는 구조조정에 대한 노동의 순응을 얻어내고 정부측에서는 노동에 조직력을 강화할 수 있는 다양한 통로를 열어주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조직률이 15%를 밑도는 노조의 대표성을 문제삼는 자세보다 기업별 노조체계를 산별 (産別) 체제로 전환해 대표성을 확대하고 노조의 책임성을 더 강화해 그로부터 타협과 양보를 끌어냄으로써 노조를 위기극복을 위한 협력의 파트너로 삼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교환은 노사분쟁에 따른 미래의 불확실성을 제거해 노동시장의 불안정을 최소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협력적 노사관계는 노사간의 일정한 힘의 균형을 전제로 한다.

노사정위는 단순히 구조조정을 원활하게 수행하려는 단기적 목표보다는 이러한 힘의 균형을 창출하고 유지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러한 균형이 깨질 때 노사관계는 불안에 휩싸이고 소모전이 지속될 수밖에 없다.

IMF위기 아래서는 고도성장기보다 노동을 배제하기가 더 쉬울 수도 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쉬운 선택이 가져오는 사회적.정치적 비용은 취약한 우리 경제와 정치적 안정성을 무너뜨릴 정도로 크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이라는 국민의 정부의 국정이념이 가장 날카롭게 시험되는 부문이 바로 이 노동문제가 아닐 수 없다.

(최창집)

◇ 필자 약력 ^55세^고려대 정외과^미국 시카고대 정치학박사^고려대교수 (현) ^미국 워싱턴주립대.캘리포니아대 (버클리) 초빙교수^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 (현) ^저서 : '한국의 노동운동과 국가' '한국 민주주의의 조건과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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