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종수의 시시각각

무엇을 위한 ‘결사반대’인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2면

얼마 전 지방의 한적한 도로변에 시뻘건 현수막이 줄지어 나부끼는 것을 보았다. 내용인즉 “주민 목숨 위협하는 ○○사의 저장고 증설을 결사 저지하자”는 것이었다. 어떤 회사가 위험물질을 보관할 저장창고를 지으려는데 주민들의 반발이 심한 모양이었다. 주민들의 요구는 그 저장고가 마을 근처에 들어서면 주민들의 생명이 위험에 빠질 염려가 있으니 짓지 말라는 것이다. 그 위험물질이 잘못 유출되면 건강에 나쁜 영향을 주거나 심하면 생명을 잃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주민들이 생각하는 최우선 가치는 주민의 생명과 건강이고, 이런 소중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저장고 건설의 중단과 철회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런데 이 같은 요구를 관철하는 방법으로 ‘결사 저지’를 내세운 것이 영 마음에 걸렸다. 결사 저지란 죽기로 작정하고 막겠다는 뜻이 아닌가. 생명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다니. ‘결사 저지’는 공사 중단과 철회를 끌어내기 위한 수단으론 지나치게 과격하다. 얻는 이득에 비해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크다.

실제로 주민들이 이 문제로 목숨을 거는 일은 없을 것이다. ‘결사 저지’란 주민들의 단호한 결의를 강조하기 위한 수사에 불과할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도 ‘결사 저지’란 말이 자꾸 거슬린 것은 요즘 우리 주변에서 이와 같은 과격한 표현이 너무나 일상화됐기 때문이다. 당장 국회 바닥에서는 민주당 의원들이 여당의 단독국회를 ‘결사반대’한다며 농성 중이고, 쌍용자동차 노조는 회사의 정리해고 방침에 ‘결사반대’한다며 이른바 옥쇄파업을 벌이고 있다.

결사반대는 비타협적인 대결의 구호다. 상대방의 주장이나 요구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산시키겠다는 것이니 합리적인 논의와 절충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나를 희생해서라도 너에게 반드시 손해를 입히고야 말겠다는 자해공갈의 수법이요,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극단적인 흑백논리다. 이런 말은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전쟁 상황이 아니고서는 쉽게 써서는 안 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 갈등이 있는 곳에선 어디서나 ‘결사반대’뿐이니 딱한 노릇이다.

뜬금없이 들릴 수도 있겠지만 갈등 문제를 경제논리로 보면 의외로 쉽게 풀릴 여지가 많다. 사실 우리가 목격하는 대부분의 갈등과 대립의 배후에는 경제적인 이해가 은폐된 경우가 많다. 앞서 예를 든 주민들의 경우 이들의 속내는 결사반대가 아닐 수 있다. 증설을 반대하는 것을 보면 이미 저장고가 있다는 것이고, 문제의 물질이 생명을 위협할 만큼 위험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타협의 가능성은 충분히 크다. 회사에 안전시설을 강화하라고 할 수도 있고, 금전적 보상을 요구할 수도 있다. 어쩌면 주민들이 내세운 결사저지 구호는 보상 수준을 높이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라는 생각도 얼핏 든다. 사회적 갈등을 경제논리로 풀어낸 대표적인 사례는 방사성폐기물처리장이다. 전북 부안군은 방폐장 유치를 결사반대한 반면, 경북 경주시는 막대한 정부지원금을 받는 조건으로 98%가 넘는 주민의 찬성으로 유치했다.

쌍용차 문제도 경제논리로 보면 지금처럼 극한적인 투쟁으로 갈 사안이 아니다. 정리해고를 철회하라는 노조의 요구는 옥쇄파업을 계속한다고 해서 이룰 수 있는 목표가 아니다. 그렇다면 정리해고 대상자들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은 금전적 보상을 가급적 많이 받는 것이다. 이미 많은 노조원들이 희망퇴직 형식으로 금전적 보상을 받고 나갔다. 이런 관점이라면 얼마든지 타협의 여지가 있다. 회사와 잔류 종업원들이 퇴직자의 고통을 적절한 수준에서 분담하면 된다. 그러나 여기에 외부 세력이 끼어들면 합리적 해결이 불가능해진다. 외부 세력의 목표는 쌍용차 정리해고자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의 숨은 목표가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켜 MB 정권에 타격을 입히는 것이라면 노조원의 이익과 관계없이 파업을 극한으로 몰고 가는 것이 정답이다. 쌍용차 노조가 ‘결사반대’의 의미를 냉정하게 다시 따져봐야 할 이유다.

김종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