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김나미의 열린마음, 열린종교] 10. 남방불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2면

▶ 산디마 스님은 한국에 있는 미얀마 근로자의 둘도 없는 친구다. 정대영(에프비전 대표)

가르침은 하나지만 불교는 크게 남방(소승)과 북방(대승)으로 나뉜다. 티베트.중국.한국.일본은 북방불교를, 태국.라오스.미얀마.스리랑카는 남방불교를 믿는다. 파고다(탑)의 나라 미얀마. 사회주의 체제에서도 정부가 불교를 적극적으로 포교, 불교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2500년 전 부처 생존 당시의 수행법인 위파사나와 탁발이 그대로 내려오고 있다.

산디마 스님. 경기도 의정부시 봉화정사 미얀마 선원의 주지다. 1998년 5월 북방불교를 견학하러 한국에 왔다. 그런데 그가 서울에 나타나자 미얀마 근로자 1000여명이 스님 주위에 모여들었다. 그때 스님은 동포애를 절감했다. 그들을 두고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아 눌러앉게 됐다.

스님은 중국과 국경을 마주한 딴얀에서 태어났다. 마약 밀매단과 정부군 사이에 총소리가 끊이지 않는 코카인 재배지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세상의 고통을 온몸으로 체험했다. 사람들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며 싸우는 원인을 찾고자 출가를 결심했던 것이 69년, 그러니까 아홉살 때였다.

그가 한국에서 처음 둥지를 튼 곳은 서울 독립문 근처의 오래된 한옥. '미얀마 선원'이라는 간판을 걸고 한국 최초의 남방불교 사원을 열었다. 미얀마 근로자의 쉼터 역할도 했다. 하지만 한국 생활은 이사와 고생의 연속이었다. 태풍에 선원이 무너져 내려 집도 절도 없는 신세가 됐다. 이후 한국 스님의 도움으로 서울 암사동 지하층에 자그마한 법당을 마련해 3년을 살았으나 이번엔 습기 찬 지하방에서 병을 얻었다.

행운이 따랐는지 의정부 봉화정사에서 도움의 손길을 뻗었다. 이곳 2층에 미얀마 선원을 다시 마련, 지난 5월 개원했다. 드디어 보금자리가 생긴 것. 스님은 감사 인사에서 "모두의 의지처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 선원에선 매주 법회가 열린다. 일자리를 잃고 갈 곳 없는 근로자가 임시로 머무는 거처도 된다. 불황으로 공장이 문을 닫아 실직한 근로자가 늘고 있다. 임금을 못 받고 한숨을 쉬는 사람도 많다. 한국인 사장이 6개월간 월급도 안 주더니 하루아침에 사라졌다는 사람도 만났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사장을 걱정했다. 선원이 고향집 같아 살만하다는 것이다.

스님은 근로자를 돌보는 중에도 수행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지난 동안거에는 송광사 선방에서 정진했다. 남방불교 전통대로 위파사나 수행을 했다.

"위파사나는 몸과 마음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그대로 보고 무아와 무상을 깨닫게 이끌어 줍니다. 부처님은 고통의 원인을 알아내고 그 원인을 없애는 길을 제시했어요. 몸과 마음이 내 것이 아니라는 존재의 실상을 알면 집착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그는 고통을 줄이는 다른 방법도 일러줬다.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지만 문제가 없는 삶은 삶이 아닙니다. 가장 의미 있는 삶은 남의 고통을 줄여주는 겁니다. 누군가 나에게 도움을 받았다면 내 고통은 그만큼 줄게 됩니다. 샘과 호수는 갇혀 있지만 강은 쉼없이 흐르잖아요. 흐르는 강물처럼 약자를 위해 아낌없이 주면 업이 녹아내리고 고통은 줄어듭니다."

인연에 대해서도 한마디 했다. 가족은 어쩔 수 없는 인연이지만 피 때문에, 업 때문에 살면 결국 상처만 남으며 진리를 위해 살면 그 만남은 영원하다고 전했다.

"생각을 멈추세요. 그러면 지혜가 자랍니다. 숨을 마시고 내쉬며 몸과 마음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무상을 알아차리세요. 순간마다 깨어 있는 상태로 허상이 아닌 실상을 보세요."

스님은 "약한 자를 위해서라면 어디든 갈 수 있다. 온 세상이 자비로 화합하기를 발원한다"며 말을 맺었다.

김나미 <작가.요가스라마원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