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존엄사 제도화 유야무야돼선 안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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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인공호흡기 제거를 허용한 대법원 판결에 따라 식물인간 상태인 환자 김모(77)씨에게 국내 첫 존엄사 조치가 시행된 데 대해 사회적 파장이 만만치 않다. 수시간 내 사망할 것이라던 의료진의 당초 예상과 달리 김씨가 스스로 호흡하며 생명을 유지해 나가자 엇갈린 반응이 쏟아지고 있다. 가족들은 호흡기를 뗀 뒤 오히려 환자의 혈색이 좋아졌다며 고통만 주는 연명 치료가 중단돼야 한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라고 말한다. 반면 연명 치료 중단에 부정적이었던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 측은 김씨가 ‘사망 임박 단계’라는 대법원의 판단이 잘못됐음이 드러났다고 주장한다. 종교계 일부에서도 김씨에 대한 조치가 성급했다며 존엄사 오남용을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지난달 대법원 판결로 진일보했던 우리 사회의 존엄사 관련 논의가 다시금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듯한 모양새다.

우리는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한 국민의 높은 관심 속에 어렵사리 첫발을 뗀 존엄사 추진 작업이 이번 사태로 유야무야돼선 안 된다고 본다. 오히려 갖가지 문제점을 보완해 사회 구성원들이 합의할 수 있는 법적·제도적 장치를 서둘러 마련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여긴다. 언제까지 논쟁으로 차일피일하면서 환자 및 가족들의 고통과 의료 현장의 혼란을 방치할 순 없기 때문이다.

국회 차원의 입법 작업이 지지부진함에 따라 얼마 전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은 자체적으로 뇌사자와 식물인간 등에 대한 연명 치료 중단의 3단계 기준을 제시해 놓은 상태다. 또 서울대병원은 말기 암환자에 대해 연명 치료 여부를 스스로 선택하게 하는 사전의료지시서 제도를 도입해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병원별로 기준과 대상이 달라 논란이 돼 왔다. 그런 점에서 대한의사협회 등 3개 의료단체가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존엄사 가이드라인의 공동 제정에 나선 것은 반가운 일이다. 어차피 관련법이 만들어진다 해도 복잡한 사례에 대한 의학적 판단 기준을 법 조항으로 일일이 규정할 순 없을 터다. 이들 단체가 심사숙고해 의료 현장에서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지침을 제시해 주길 바란다.

김씨 사태를 계기로 우리 사회의 죽음에 대한 인식도 한 단계 성숙해지길 기대한다.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선 죽음을 앞둔 환자에게 질병 상태를 정확히 알리고 연명 치료 여부를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10%에도 못 미치고 여전히 대다수 환자와 가족들이 죽음을 금기시하며 준비 없이 임종을 맞는 게 현실이다. 삶과 죽음은 결코 별개가 아니며 죽음을 제대로 준비할 때 남은 삶을 더욱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열악하기 짝이 없는 호스피스 서비스도 시급히 확충·개선해야 할 것이다. 무의미한 연명 치료를 거부한 환자들이 통증과 공포에서 벗어나 편안하게 세상과 작별할 수 있는 여건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결코 존엄한 죽음 맞이라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