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기업퇴출'의 후속과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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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그동안 말만 무성하던 기업퇴출이 사실상 정부에 의해 단행됐다.

기업계나 경제전문가 일각에서는 정부가 퇴출기업을 지정하는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지만 종합적인 상황을 볼 때 불가피한 측면이 없지 않다.

막대한 대내외 채무와 부실채권의 늪에 빠져 기업계와 금융계가 서로의 이해로 자발적 구조조정 노력을 지연시켜 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이 귀국후 가진 국무회의에서 개혁의 속도를 빨리 하라고 다그친 직후 당초보다 규모가 늘어난 퇴출기업의 발표시점에 주목한다.

이는 그동안 구조조정을 말로만 했지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는 외국인들의 비판에 대한 화답이라는 정치적 의미가 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제까지 진행된 구조조정의 추진주체와 방식에 상당한 문제가 있다는 점이 드러났다.

꼭 대통령의 질책이 있고서야 경제팀이 움직인다면 곤란한 일이다.

따라서 이헌재 (李憲宰) 금융감독위원장이 말한 대로 이번 발표가 끝이 아니라 경제위기 타파를 위한 시작으로 보고 심기일전 (心機一轉) 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번 55개 기업의 퇴출발표는 대내외에 우리의 구조조정 실천을 알리는 상징성 때문에 정부가 전면에 나서 요란하게 했지만 다음부터는 금융부문이 구조조정되는 것에 발을 맞춰 조용히, 그러나 일관성 있는 시장원칙에 따라 부실기업 퇴출문제를 결정해야 한다.

그래야 불필요한 부작용을 그만큼 없애고 조정비용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퇴출이 결정된 기업의 면면을 보면 관련은행과 금감위가 일정한 기준에 따라 선정했다는 설명에도 불구하고 충분치 못한 부분이 많다.

5대기업 계열사도 넣고 협조융자기업 중에서도 뽑고 하는 식의 구색맞추기 냄새도 난다.

이 점에서 우리는 이헌재위원장이 말한 대로 은행에 의한 지속적인 기업건전성 감시와 금감위의 금융감독에 앞으로는 허점이 보여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퇴출 발표 직후의 여파는 국내의 금융 및 주식시장동향을 볼 때 예상보다 크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막상 당해기업을 청산하거나 인수합병하는 단계로 가면 계열기업간 지급보증이나 고용승계를 둘러싸고 부작용이 나타날 것이다.

또한 관련기업의 하청기업이나 거래기업, 그리고 대출해 준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누적 등 신경써야 할 문제가 한 둘이 아니다.

이번 퇴출기업 명단에는 논란돼 왔던 몇 개 대기업그룹간의 사업 맞교환 (빅딜) 내용이 빠져 있다.

이미 金대통령이 강한 톤으로 빅딜의 실천의지를 내비쳤기 때문에 관계기업과 정부간에 논의의 진전이 있을 것이다.

사실 빅딜은 당해기업의 단기적 이익 및 불이익의 차원을 넘어 막대한 대내외 채무의 근본원인으로 지목돼 왔던 중복투자의 비효율성을 줄이는 계기도 될 수 있다.

정부는 관계법령의 정비나 지원조치를 준비해 빅딜에 따른 기술적 난점 해소에 나서야 할 것이다.

일단 빅딜 이슈가 표면에 떠오른 이상 시간을 끌면 비용이 커진다는 점도 유의해야 할 것이다.

모양새는 은행장이 발표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결국 정부가 사실상 퇴출기업의 선정을 지휘한 것은 그만큼 기업개혁 못지않은 금융개혁의 시급성을 말해 주고 있다.

다시 말해 그동안 은행이 자율적인 권한과 책임을 갖고 사업의 수익성을 감안해 제대로 대출했다면 이런 난리를 겪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많은 전문가들이 주장하는 시장원칙에 맞게 경제를 운영하는 길이다.

따라서 구조조정의 속도를 늦추지 말고 바로 은행개혁에 착수해 재정자금 투입을 포함한 자구노력으로 부실채권 줄이기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퇴출기업 중에는 상장기업이 10개나 끼어 있는데 이런 식으로 소액주주의 권리가 훼손당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면 안된다.

그러자면 은행과 기업 모두가 시장원리에 맞게 다시 태어나야 한다.

마지막으로 퇴출기업 정리과정에서 생겨나는 실업에 대해서는 기존의 정부대책을 효율적으로 활용해 새로운 진로모색 기간의 고통을 경감해 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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