父子배짱, 이 땅의 날개를 달다 ③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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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얕봐? 스카이팀 만들어버려” - 2000년

박정희 “적자 항공사 사주시오”, 조중훈 “알겠습니다” #조양호, IMF와 9·11 때 “기회다, 비행기 사라” #새 연재 | 그때 그 결단 - 대한항공 조중훈·조양호 회장

결 단 5
월간중앙조양호 회장의 결단은 도전에서 시작한다. 그 중 또 하나의 걸작품이라면 ‘스카이팀’ 창설일 것이다. 비행기를 타면 스튜어디스의 안내 방송을 통해 “스카이팀은 승객 여러분을…”하는 멘트를 들었을 것이다. 바로 그것을 조 회장이 주도해 창설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1990년대 후반부터 세계 항공업계는 이른바 ‘동맹체’를 결성하는 변화의 흐름을 보이기 시작했다. 국적항공사의 개념이 흐려지는 상황에서 항공사들은 생존을 위해 1997년과 1999년 미국의 유나이티드항공과 아메리칸항공을 필두로 각각 ‘스타얼라이언스’와 ‘원월드’라는 항공 동맹체를 만들었다.

이들 동맹체 결성의 목적은 분명했다. 엄청난 자금을 투입하고 치열한 노선경쟁을 벌이면서 전투에 가까운 생존싸움을 계속할 것이 아니라 항공 동맹체를 통해 노선 확보와 배분, 라운지 공동 사용, 원스톱서비스, 마일리지 혜택 확대 등의 고객 요구를 공동으로 지원하고 국제 항공 규제와 제약(노선 개설·운항·공급 등에 대한 국가 간 협정을 통한 규제) 등에 연합해 대응하자는 것이 동맹체 결성의 목적이다.

물론 대한항공도 글로벌 항공사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항공 동맹체에 가입해야 했고, 편하게 가자면 이미 만들어진 두 개의 동맹체 중 하나를 택해 가입하기만 하면 해결될 일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조 회장은 신중했다.

그동안 기존 동맹체 활동을 주시해왔던 그로서는 스타얼라이언스나 원월드가 추구하는 방향이 고객의 기대에 못 미친다고 생각한 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대한항공이 항공 동맹체 운영에 주도적으로 참여해야지 후발로 참여해 깃발이나 흔드는 조직처럼 보인다는 것은 자존심의 문제이기도 해서 기분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조 회장은 기존 항공 동맹체의 장·단점을 면밀히 분석한 후 새로운 형태의 항공 동맹체인 스카이팀을 창설하기로 결심하고 시동을 걸었다. 그러나 도전에 대한 응전은 항상 만만치 않는 법이다. 굴지의 미국 항공사들은 대한항공을 의도적으로 아시아의 작은 지역 항공사로 치부해버리기도 했고, 때로는 키워줬더니 겁 없이 도전한다는 냉소적 소문을 퍼뜨리기도 해서 배신자처럼 분위기를 유도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친분이 깊은 항공사 회장을 통해 회유할 때는 신 동맹체 창설을 주도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굴지의 항공사들의 압력도 있고…. 무엇보다 항공업계는 선대 회장님과 친분이 두터웠던 분들이 대부분 아닙니까? 그런 분들이 국제적 항공사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조양호 회장님한테 ‘그거 뭘 힘들여 만들려고 해요? 두 개나 만들어져 있는데.

잘못하면 튀어 보이니 그냥 묻혀 가는 것이 어때요’ 하면 조양호 회장님도 굉장히 난감하실 것 아닙니까? 항공업계는 의리도 중시하는데…. 그러니 동맹체 창설이 생각처럼 쉬울 수 없지요. 그래서 고민도 참 많았을 겁니다.”

이제는 대한항공을 떠난 조종사 출신의 중역은 조 회장의 입장이 눈에 보였다고도 했다. 그러나 가치 있는 고민이라면 크든 적든 태연하게 고민을 즐기는 인물이 조 회장이라는 것은 모르는 것 같았다. 조 회장은 30년 가까이 세계 항공업계에서 구축한 인맥과 명성이 있었다.

그리고 항공분야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던 식견이 있었다. 그는 분연히 일어섰다.“맨 먼저 우리와 가까운 관계였던 델타항공에 동맹체를 제의했어요. 그리고 내가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내던 에어프랑스 회장에게 직접 찾아가 뜻을 같이하자고 했지요. 그분들이 기존 동맹체에 가입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고 있었던 데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내가 이런 일은 이렇게 해야 동맹체의 의미가 커지는 것 아니냐고 설명했더니 바로 공감하고 동의했어요.

그래서 대한항공·델타항공·에어프랑스·아에로멕시코 등 각 대륙을 대표하는 4개 항공사가 2000년 6월22일 뉴욕에 모여 고객 중심 항공 동맹체인 ‘스카이팀’을 출범시켰지요. 그랬더니 4개월 후 체코항공이 가입해왔고, 당시 원월드에 가입 예정이던 알리탈리아항공은 내가 회장과 친분이 있기도 해 직접 로마로 날아가 설명했더니 그 자리에서 승낙하고 2001년 7월 스카이팀 회원사로 가입했어요.”

문제는 연평균 10%가 넘는 경제성장률과 세계 최대 규모인 13억 명의 인구를 자산으로 향후 세계 항공시장의 핵심으로 부상할 중국 항공사를 누가 가입시키느냐 하는 것이 관건. 더구나 2008년 베이징(北京)올림픽과 2012년 상하이(上海)엑스포를 계기로 폭발적 성장을 앞두고 있던 시점이었다.

때문에 중국 최대 항공사인 중국남방항공을 가입시킨다면 동맹체의 판도를 바꾸어 놓을 정도로 파괴력을 지니게 되고 승부는 심판이 없어도 가려지는 상황이었다.

“한번 저질러보지 뭐. 중국 항공사로는 최초로, 그것도 중국의 최대 항공사인 남방항공이 스카이팀에 가입한다면 아시아 항공시장은 물론이고 세계 항공시장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다줄 일대 사건이 될 텐데, 내가 직접 만나 얘기해보지. 지금 곧바로 남방항공 회장실로 예방 스케줄을 잡고 비행편을 예약해. 남방항공기를 타고 들어갈 테니까.”

조양호 회장이 자사 비행기를 타지 않고 중국남방항공기를 타고 베이징으로 들어간다고 했을 때 대한항공 임직원들보다 남방항공 임직원들이 더 놀랐을 것이다. 결국 그는 성공했다. 11번째 회원사로 중국남방항공을 가입시킨 것이었다.

이로써 항공 동맹체 중 가장 늦게 설립된 스카이팀은 창설 후 9년 만에 14개 회원사(정회원사 11개, 준회원사 3개)로 늘어났고, 총 2,496대의 항공기가 전 세계 169개국 905개 도시에 하루 약 1만6,787편의 항공편으로 회원사끼리 연결하면서 연간 4억6,200만 명을 수송하는 세계 최대의 항공 동맹체로 성장했다. 결심이 서면 바로 행동하는 조 회장을 두고 세계 항공업계가 괴걸의 힘을 지녔다고 평가하는 것은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만은 아닌 것이다.

이 호 [leeho5233@hanmail.net]

경주 출생. 한양대 재학 시절 MBC 라디오 드라마 <젊은 태양>으로 데뷔한 후 방송작가로 활동해 왔다.

그의 작품으로는 KBS 라디오 <격동 30년><경제실록 50년>을 비롯해 MBC TV <제4공화국> 등 다수가 있다.

1988년 대한민국방송대상 극본부문을 수상했다. 현재 월간중앙 객원기자로 활동 중이다.

글 이 호 월간중앙 객원기자·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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