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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산하 우리풍물]23.전북 고창 신재효 古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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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판소리가 무엇이냐. 소리와 노래는 다른 법. 짧은 '노래' 로 담기에 벅찬 다양한 세상을 담고 있다고 해서 '소리' 요, 춘향가.심청가 등 한판.한판의 이야기가 다르다고 해서 '판소리' 다.

판소리가 이 땅에 등장한 것은 18세기. 악 (樂) 의 중심이 조정에서 민간으로 옮겨지고 양반의 권세다툼과 착취로 혼란스런 시절이다.

이때 백성들은 그들의 감정을 추스리는 민중음악으로 판소리를 선택했다.

모든 예술이 그렇듯 판소리도 처음부터 세련됐던 것은 아니다.

19세기들어 '민중 연희의 꽃' 으로 등장하기까지 판소리는 고창의 한 음악애호가를 통해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된다.

동백꽃이 휘모리 가락처럼 무더기로 피고 지는 선운산을 거느린 고창. 고창군청에서 고창 읍성 (일명 모양성) 을 향해 5분쯤 걷다보면 '신재효 고택' 이라 써붙인 초가가 나타난다.

동리 (桐里) 신재효 (申在孝, 1812~1884년) .중인출신 천석꾼 부자로 판소리 사설을 집대성하고 광대가.호남가 등을 창작했으며 소리꾼에게 소리를 가르치고 집과 양식을 마련해준 '판소리계의 성자' 다.

"신재효 선생은 '귀명창' 입니다. 소리는 안 했지만 소리를 이해하고 사설과 소리의 궁합을 맞출 정도로 음악적 소양이 뛰어났으니까요. " 국문학자이면서 판소리 연구가인 강한영 (85) 박사는 신재효가 사설을 집대성한 업적만으로도 '동양의 셰익스피어' 가 될 만하다고 말한다.

신재효 고택은 바로 신재효가 사설을 집대성했던 서재. 박쥐우산만큼이나 넓은 입사귀를 가진 오동나무 아래 소리꾼들의 타는 목을 적셔주던 우물이 나그네를 맞이한다.

"고창 읍내 홍문 거리/두충나무 무지개안/시내 우에 정자 짓고/정자 끝엔 포도 시렁/포도 끝에 연못이라…" 신재효의 자서가 (自敍歌)가사를 보더라도 그의 집은 비단 이 초가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초가 주위 연못도, 정자도 보이지 않는다. 초가를 나와 고창 읍성에 올라서니 동리 국악당에서 나온 학생들의 소리연습이 한창이다.

"은지야, 정순아. 그 소리는 느린 진양조야. 빠른 휘모리와는 다르단 말야. 심청이 인당수에 빠질 때의 심정을 담은 비장한 계면조란 말야. 자, 다시 한번 해보자. " 과연 이들은 알까. 신재효가 연극의 3요소를 정의한 아리스토텔레스처럼 '광대가' 를 통해 이미 명창의 자격조건을 정해놓았음을…. 신재효는 인물.사설치레 (대사표현).득음 (자유자재로 소리를 낼 수 있는 경지).너름새 (연기력) 를 명창의 구비조건으로 삼았다.

'신재효찾기' 의 종착역은 동리 국악당. 안으로 들어가니 장단과 소리의 세상이다. 공연장에서는 50여명의 소년과 소년들이 북을 치는 소리가 들려 오고 지하 연습장에서는 가야금 반주소리, 유치원생부터 중학생까지 '판소리 꿈나무' 들의 여리고 앳띤 소리가 귀를 즐겁게 한다.

"신재효선생은 각 명창 고유의 음악적 스타일인 '더늠' 이나 '바디' 를 가지지않고 판소리를 키운 분입니다.

소리꾼의 출신지역과 계보를 가리지않고 소리를 가르치고 경제적으로 후원했어요. 고창에 전국의 명창이 모여 소리촌을 건설하고 소리의 맥을 이어보는 것이 어떨까요. " 이곳에서 만난 동리 국악당 이기창 (53) 소장은 '신재효의 고향' 고창이 '판소리의 메카' 가 되기를 소망한다.

글 = 송명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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