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차 “돈 줬지만 대가성 없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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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차 게이트’를 둘러싼 법정 공방이 치열해지고 있다.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과 그에게서 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들이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의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명백하고 분명한 증거’도 마땅히 없는 실정이다.

23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재판에서 박 전 회장은 자신의 뇌물공여 혐의를 일절 부인했다. “돈을 준 사실은 있지만 대가성이 없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박 전 회장의 변호인인 조현일 변호사는 “박 전 회장이 금품을 건넨 행위가 범죄 구성요건에 해당하는지 의문”이라며 “재판부가 현명하게 판단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대가성이 없었으므로 박 전 회장이 준 돈을 뇌물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조 변호사의 설명이다. 여기다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이광재 의원도 최근 재판에서 “박 전 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은 적이 없다”고 강력히 부인한 데다, 박 전 회장도 이 의원에게 사과하는 진술을 했었다.

대검 중수부가 6개월여에 걸쳐 진행해온 정·관계 인사들에 대한 금품 로비 사건의 틀이 전체적으로 틀어질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검찰도 향후 재판 진행을 염려하는 분위기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실패에 이어 또 다른 피고인들 중 일부가 무죄를 선고받을 경우 가뜩이나 입지가 좁혀진 검찰에 치명타를 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목적을 위한 강압수사’라는 비판이 다시 불거질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대검 중수부 관계자는 “박 전 회장은 검찰 조사에서도 비슷한 취지의 진술을 했었다”면서 “공소 유지에는 별 문제가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혐의 부인 잇따라=조 변호사는 이날 박 전 회장이 건넨 뇌물과 배임수재 등의 혐의를 조목조목 반박했다. 박정규 전 청와대 민정수석에게 건넨 상품권 1억원어치(9400만원 상당)와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에게 건넨 3억원과 상품권 1억원어치에 대해 “구체적인 청탁이 없었고, 실제 편의를 제공받지도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택순 전 경찰청장(뇌물 2만 달러)에 대해서는 “향후 사건이 발생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겠다는 정도로 생각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다 금품 수수자 중 상당수는 대가성은 물론 돈을 받은 사실 자체도 부인하고 있다. 지난 11일 민주당 이광재 의원의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박 전 회장은 사과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 의원이 “2002~2008년까지 계속 돈을 주겠다고 한 것을 안 받았는데 왜 검찰에서 돈을 줬다고 했느냐”고 묻자 “본의 아니게 죄송하게 됐다. 사죄한다”고 대답했다. 박 전 회장은 “2006년 서울의 한 호텔에서 5만 달러를 건넸으나 이 의원이 거절해 옷장 안에 두고 먼저 나왔다. 그가 돈을 가져갔는지는 모른다”고 증언했다. 박 전 회장의 진술이 정확하다던 검찰의 주장과 배치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법조 관계자는 “수사의 핵심이었던 박 전 회장 진술의 신빙성이 낮아질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상황에 대해 재판부가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가 있다’고 볼 경우에는 재판에 중대한 변수가 될 수 있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검찰이 박 전 회장 측 진술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향후 공소 유지에 애를 먹을 것 같다”고 전망했다.

김승현·최선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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