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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눈]엔-달러 힘겨루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달러는 중세 보헤미아인들이 쓰던 은화주화 'thaler' 에서 유래한다.

일본의 엔, 중국의 위안, 한국의 원도 작고 둥글다는 중국어 원 (圓)에서 비롯됐다.

축구공으로 지구촌이 후끈 달아오르는 와중에 또 하나의 동그라미 '전쟁 (錢爭)' 이 한창이다.

환율은 두 통화간의 교환비율이다.

일본 엔화는 95년4월 달러당 79.75엔까지 치솟았었다.

지금은 달러당 1백45엔선, 3년여만에 가치가 40% 이상 떨어졌다.

제2경제대국의 돈 가치가 어떻게 이토록 급락할 수 있을까. 일본은 해외자산이 8천억달러나 되는 제1의 채권국가다.

외환보유고는 2천2백억달러, 개인금융자산은 1천2백조엔이다.

제조업의 경쟁력은 세계최고수준이고 미국과의 무역에서 여전히 엄청난 흑자를 내고 있다. 겉모양으로 보아서는 얼른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문제는 그 활력이다.

일본 경제는 '해변에 끌어올려진 고래' , 폴 크루그먼식 표현으로 '유동성 덫' 에 걸려 있다. 과잉설비.과잉고용.과잉채무에 따른 공급과잉은 국내총생산의 5%에 육박한다.

금융.건설.유통산업의 저생산성은 이미 이름이 나 있다.

노동집약적 분야는 후발국들의 '인해전술' 에 잠식당하고 반도체 등 기술집약분야는 생산기지의 '탈 (脫) 일본화' 가 진행중이다.

인구의 노령화로 생산성은 저하되고, 물가가 내려가도 소비는 않고, 초저금리 속에서도 저축만 하려든다.

경기를 부양하느라 재정에서 92년 이후 무려 75조엔을 쏟아부었고, 올해에 다시 16조엔을 투입한다지만 구조개혁이 뒷받침되지 않는 재정자금투입은 '밑빠진 독에 물붓는' 격이다.

엔.주가.채권의 '트리플 약세' 속에 자본의 해외이탈이 줄을 잇고 있다.

반면 미국 달러 가치는 월가 주가와 함께 고공비행이다.

미국 기업들의 경쟁력회복에다 글로벌화에 따른 미국으로의 자금유입은 무역적자에 비길 바가 아니다.

정보산업기술에 바탕을 둔 '파이낸셜 엔지니어링' (금융공학) 기법은 일본이 미국에 20년정도 뒤져 있다.

미국경제의 활황에 '거품' 경보도 심심찮지만 오늘의 달러 경쟁력은 경기사이클이 아닌, 글로벌 경쟁력에서 미국의 독주를 반영한 측면이 더 강하다.

엔 가치가 더 떨어지면 일본의 수출이 늘어 경기회복에는 도움이 된다.

문제는 그 국제적 파장이다.

엔과 유대가 밀접한 아시아국가의 통화들이 경쟁적 절하압력을 받아 아시아 통화위기는 증폭된다.

일본 경제가 '덫' 에서 빠져나오기는커녕 아시아를 비롯, 세계 경제를 '덫' 으로 끌어들이는 격이다. '아시아 경제회복에 엔저가 발목을 잡고 있다' 는 일본 책임론도 여기서 나온다.

미국은 "엔저가 일본 경제의 취약성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해법은 일본 스스로 찾아야 한다" 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공동개입에 의한 일시적 해결책보다는 차제에 일본 경제의 구조개혁을 밀어붙이는 압박카드로 활용하려든다.

일본이 보유한 3천억달러의 미국 재무부채권을 한꺼번에 팔아 일본의 위력을 보여야 한다는 이시하라 신타로류의 감정적 항전론도 고개를 든다.

그러나 이는 국제금융의 현실을 너무 모르는 소리다.

국제결제는 70% 이상이 달러로 이루어진다.

미국 재무부채권은 수익률은 낮지만 가장 안정되고 확실한 채권이다.

중도에 달러가 필요하면 미국 정부는 이를 담보로 달러를 빌려준다.

미국의 무역적자로 빠져나간 달러는 흑자국들이 재무부채권을 사 미국으로 도로 환류된다.

이 환류시스템은 달러 주도 국제금융시스템을 받치는 하나의 하부구조다.

재무부채권 보유액은 영국이 전체의 12%로 어느새 일본을 약간 앞질렀다.

유럽단일통화 출현 등 대응세력 등장에 아랑곳없이 '글로벌 스탠더드' 는 미국이 그 표준으로 자리잡는 가운데 달러의 위상은 되레 강화되는 경향이다.

일본이 '마이웨이' 를 고집할 경우 엔저 - 수출부진 - 원절하 - 외채상환부담증가 - 외환위기재연으로 고래싸움에 한국의 '등' 이 터지지 않을까 실로 걱정이다.

변상근 편집국장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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