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금융기관 예금빼오기 '진흙탕 싸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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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서울의 한 아파트단지내 S은행 지점장 K씨는 얼마 전 아파트부녀회에 인사차 들렀다가 부근의 다른 은행 직원들과 대판 싸움을 벌였다.

K씨가 도착해 보니 타은행 직원들이 "S은행은 위험하니 안전한 우리 은행으로 오십시오" 라며 주부들을 열심히 설득하고 있었던 것. K씨는 그 뒤로 예금섭외보다는 경쟁은행의 흑색선전을 감시하는 데 더 신경을 쓰고 있다.

지난 10일 대전시의 한 신용협동조합. 인근 금융기관이 신협중앙회의 부실신협 조사와 관련해 "신협은 불안하니 예금을 옮기는 것이 좋다" 고 선전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현장을 덮쳤다. 직원들끼리 실랑이가 벌어진 것은 물론이다.

금융기관 점포장들은 요즘 '진흙탕 선거유세전' 을 치르는 기분이다. 자기선전에만 머물지 않고 경쟁상대를 깎아 내리는 기관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최근 예금자보호제도가 개편된 뒤 더욱 심해졌다.

대형은행은 공신력을 감안해 자제하고 있으나 소형 금융기관들은 체면을 가리지 않는 모습이다.

모은행 개인영업담당부장은 "신규고객을 확보하기 어려워지자 슬슬 예금빼오기 경쟁이 고개를 들고 있다" 며 "저절로 예금이 들어오는 초우량은행 아니면 대부분 사정이 비슷하다" 고 말했다.

흑색선전.상호비방은 예사다. 신문.잡지를 샅샅이 뒤져 단 한 줄이라도 경쟁기관에 불리한 표현이 있으면 쾌재를 부른다.

즉시 복사기로 확대해 전단을 만든 뒤 각 점포에 비치해 두며 고객의 눈에 띄도록 한다. 금융기관 구조조정 와중에서 예금주들의 불안한 심리를 교묘하게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쟁은 지방의 서민금융기관들 사이에서 더 심하다.

최근 경영이 부실해진 71개 신협에 대해 신협중앙회가 실태조사를 벌이자 "신협이 부실해 일제조사를 받고 있다" 는 소문이 퍼졌고 다른 금융기관들이 이에 편승했다.

또 신협이 망하면 예금 되돌려받기도 어렵다는 말도 곁들여 은근히 불안감을 조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부실징후가 보여 조사를 받는 신협은 극소수이고 예금은 원리금 전액이 정부에 의해 지급보장을 받은 상태다.

투신사도 손꼽히는 피해자다. 얼마 전 감독당국에 의해 부실규모가 공개되자 은행.보험사들이 고객들에게 "투신은 위험하다" 고 설명해 예금인출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보험사도 최근 감독원의 경영평가 결과가 나오자 C등급을 받은 회사들에 해약문의가 빗발쳤다.

여기에다 예금자 보호범위가 확정되면서 일부 서민금융기관들은 예금주들에게 "분산예치가 유리하다" 며 은행의 예금을 일부라도 옮겨 오라고 은근히 암시를 주고 있다.

이 때문에 예금자들만 혼란을 겪고 있다. 자신이 거래하는 곳이 안전한지 불안한지 스스로 판단하지 못한 채 선전에 솔깃해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는 것. 그러나 무작정 만기전에 예금을 해지해 다른 곳으로 옮기면 이자만 손해 볼 수도 있다.

더 위험한 것은 소문에 휩싸여 예금을 빼려고 우르르 몰려드는 것이다. 자칫하면 멀쩡한 금융기관이 쓰러질 가능성도 있다.

감독당국도 이 점에 대해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은행감독원은 예금이동을 예상해 지난 주말 각 은행에 "예금인출 사태에 대비해 유동성확보 대책을 세우라" 고 지시했다. 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한국은행과의 협조 아래 부실은행의 현금흐름을 일일점검하고 있다.

이와 함께 금융기관간 상호비방도 엄격히 단속할 방침이다.

금융감독위원회는 은행.증권.보험감독원 및 신용관리기금에 각각 신고센터를 설치해 상호비방 사례를 제보받아 조사하고 있다. 악의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즉시 임직원을 문책하기로 했다.

은감원 검사통할국 남인 (南仁) 과장은 "구조조정 과정에서 나타날 수도 있는 상호비방에 따른 예금인출 사태에 대비해 상시점검에 나서고 있다" 고 말했다.

남윤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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