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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가 위험하다]5.뒷걸음 예술교육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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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지휘자 정명훈,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강동석.장영주, 첼리스트 장한나, 피아니스트 백건우.백혜선…. 세계무대에서 한국을 빛내고 있는 자랑스런 음악가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국내에서 대학을 졸업했다면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해마다 엄청난 예술계 대학 졸업생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도 세계적인 '국산 예술가' 를 탄생시키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술활동의 뼈대랄 수 있는 창의성 개발보다 기계적인 모방에 후한 점수를 주는 현행 교육제도 때문이다.

그래서 세계적인 예술가로 성공하려면 일찌감치 유학을 떠나고, 국내에 자리잡으려면 학맥.인맥을 얻기 위해서라도 대학 과정은 마치고 떠나라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돈다.

외국 유학을 떠난 예술계 학생들은 두번 놀란다. 처음엔 눈부신 테크닉으로 칭찬을 받을 때, 나중엔 일일히 가르쳐 주지 않고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라는 질문만 계속 퍼붓는 외국인 교수의 표정을 대할 때다.

입시 위주의 기계적인 반복 연습으로 선생 흉내내기에 급급할 뿐 기본기는 물론 응용력.유연성이 부족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판이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일찌감치 학위나 따서 귀국하는게 상책이다. 유학 시절에 준비한 졸업연주회 프로그램을 귀국독주회에서 한번 선보이고 나선 일찌감치 '레슨 시장' 으로 잠수해버린다.

'족집게 과외' 는 예술 분야라고 예외는 아니다. 석고 소묘와 평면구성 등의 입시과목이 30년 이상 지속되다 보니 정형화된 그림을 주입식으로 가르치는 학원에서 '예상문제' 를 외워다가 짧은 시간에 토해내듯 재빠르게 그려낸다.

조형의 개념이 다양화되고 응용미술.디자인 계열등 미술관련학과가 세분화되는 상황에서 현행 미대입시는 '잘 묘사된 그림' 이라는 기준만으로 한정해 실력을 평가하고 있어 자질있는 학생을 골라내기 어렵다.

학생들은 다양한 해석과 아이디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처음부터 박탈당하고 있다. 예술계에는 작품이 아니라 '사단 (師團)' 이 존재할 뿐이다.

창의력 개발에 실패한 예술교육은 결과적으로 예술가보다 예술교육가를 양산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그래서 예술 자체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보다 이들 예술을 직업적으로 가르치는 사람들, 레슨을 생활의 방편으로 삼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예술시장.공연장.미술관의 규모에 비해 예술교육만 비대해지고 대학은 소수의 기득권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재생산해내는 장치로 전락했다.

예술가로서의 자질, 즉 창의성을 따져 예술가와 예술교육가를 분리해낼 수 없는 현행 교육제도는 말하자면 피아노 선생이 되기 위해 피아노를 배우는 학생들만 무더기로 배출해내는 악순환, 즉 제닭 잡아먹기를 되풀이하고 있다.

이 메카니즘을 확대 재생산하는 것은 예술계 대학을 대학 간판을 따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일부 학부모들의 허영심과 허위의식이다.

자식의 예술적 재능을 과신하는데다 학업성적이 좀 떨어지기라도 하면 '예술의 세계' 로 등을 떼밀고 있는 것이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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