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장규 칼럼

이미 시작된 일본식 장기불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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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경제가 위기냐 아니냐가 시빗거리더니, 최근 들어서는 일본식 장기불황이냐 아니냐로 논란이다. 정부당국자는 "그렇진 않다"고 한다.

요컨대 한국은 일본보다 ▶노령화가 아직 멀었고 ▶주택보급률과 소비재 소비가 더 늘어날 수 있으며 ▶부동산 버블이 덜하고 ▶재정적자가 훨씬 덜하며 ▶구조조정도 한국만 못했다는 점 등을 들고 있다. 일리있는 지적들이다.

*** 산업구조 바뀌면서 겪는 진통

그러니 정부로서는 지금의 나쁜 경기는 일본과 달리, 얼마 안가 좋아질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지금의 한국경제 상황을 1990년대 초반의 일본경제와 수평 비교하는 것은 너무 억지스러운 점이 많다. 당시의 일본경제는 미국경제를 때려눕힌 무서운 기세로 세계 경제를 주름잡던 위세와 교만이 빚어냈던 버블의 결과요 후유증이었다. 기본 경제력면에서나 처해 있는 대내외적인 상황면에서 그때의 일본과 지금의 한국이 너무도 다른 데도 현상적인 몇가지 차이점만 비교한다는 것이 애당초 말이 안 된다.

공연히 엉뚱하게 차이점들을 둘러대느니보다 오히려 중요한 공통점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일본 불황이 그처럼 오래 지속됐던 첫째 이유가 바로 초장의 낙관론 탓이었다고 한다면 지금의 한국정부 낙관론이야말로 일본의 장기불황을 똑같이 답습하는 코스를 재촉하고 있는 셈이다. 일본 정부 당국자들이나 대부분의 전문가도 일본경제가 그처럼 오랜 불황에 시달릴 줄 몰랐었다. 진작 심각성을 깨달았다면 달리 방책을 강구했을 것이다.

지금의 한국 사정이 그와 닮은 꼴이다. 여차직하면 일본식 10년 불황이 아니라 남미경제의 전철을 밟을지도 모를 지경인데도 '경제위기론'이나 '장기불황론'을 꺼내면 개혁의 반동분자로 모는 분위기니 딱한 노릇이다.

더 본질적으로는 일본이나 한국이나 경제구조가 대대적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불황의 진통을 겪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도 당시 제조업 공동화현상이 본격적으로 심해졌었고, 한국도 한박자 늦게 그런 현상이 벌어지면서 일자리마저 해외로 빠져 나갔다. 여기에 더해 IT 첨단산업이 급속히 확산되면서 고용없는 성장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두 나라 모두 노동집약적인 산업구조가 기술집약 쪽으로 바뀌는 바람에 빚어진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정책의 실패 탓이 아니라 정책의 성공 때문에 빚어지는 일들이다.

그러고 보면 한국경제도 이미 일본식 장기불황에 빠져든 지 제법 오래된 셈이다. 일본식의 버블 붕괴 현상이 한국에선 97년 소위 IMF 사태 때부터 이미 시작됐다고 할수 있으며, 따라서 불황도 그때부터 카운트해야 한다면 햇수로 벌써 7~8년째 되는 셈이다. 한때 경제가 급속히 회복되는가 싶었던 것은 김대중 정부의 성급한 경기부양책 탓에 빚어졌던 해프닝이었다. 계속 고통을 감내하며 인내심을 가지고 치료를 받았어야 할 시기에, 제2의 버블을 일으켜 놓고서 경제가 진짜로 좋아진 줄 알고 흥청거렸다가 지금 와서 다시 까부라지고 있는 것이다. 소비가 줄고 투자가 안 된다고 아우성인데 소득도 투자도 대체로 97년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여러 경제지표들이 바로 그러한 증거들이다.

*** 성급한 경기 부양이 착시 일으켜

일본은 드디어 긴 터널을 빠져나와 소비와 투자가 탄탄하게 늘고 있다. 우리도 10년만 채우면 저절로 경기가 회복되는 건가. 요즘 분위기로는 도무지 그럴 것 같지 않다. 일본의 불황 극복은 긴 인내와 사회적 합의가 바탕이 됐었다. 여기에 비하면 한국경제는 컨센서스는 고사하고 여전히 사분오열이다. 불황의 끝이 어디냐를 가늠하기에 앞서 어제도 오늘도 사방에서 파업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경제를 걱정하는 나라의 모습이 전혀 아니다. 일본의 불황이 그처럼 오래 끌며 우여곡절을 겪었어도 한국처럼 공허한 이데올로기 투쟁이나 이처럼 적대관계의 심각한 노사대립은 없었다. 위험을 모르고 있는 상태야말로 진짜 위기 아니겠나. 섣부른 회복을 기대할 게 아니라, 차라리 소비는 더 위축되고 투자는 더욱 움츠러들 수 있다는 점을 솔직히 받아들이자. 임금인상은 고사하고 일자리가 줄어드는 사태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꼭 겪어봐야 알 것인가.

이장규 경제전문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