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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외도·도박이 문제 … 요즘엔 ‘불성실’도 이혼 사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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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여기 남녀 286쌍이 있다. 부부의 연을 맺었다가 지난해 서울 지역 이혼법정에 섰던 이들이다. 이들은 어쩌다 결혼 서약을 깨고 ‘장미의 전쟁’에 들어가게 됐을까. 이혼 사건 판결 191건과 조정 96건에 비친 사회의 변화상을 들여다봤다.

#. 30대 회사원 A씨는 결혼하고 2년 뒤 직장의 부하 여직원과 불륜에 빠졌다. 맞벌이를 하던 아내가 회사 일로 출장을 떠난 어느 날 그는 여직원에게 “OO아, 오늘 밤 만나자”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나 아차, 하는 순간에 번호를 잘못 눌렀다. 메시지가 도착한 곳은 아내의 휴대전화였다. 아내는 여직원과 만나 남편의 외도 사실을 확인하고 이혼 소송에 들어갔다.

#. 30대 직장인 B씨는 1주일에 3일 정도 술을 마시고 귀가했다. 새벽 2~3시에 귀가하는 일도 잦았다. 집에 들어오면 아내 C씨에게 욕을 하거나 가볍게 몸을 밀치기도 했다. 주말엔 하루 종일 누워서 텔레비전만 봤다. C씨는 “더 이상 참으면서 살고 싶지 않다”며 이혼을 청구했다.

이처럼 문자메시지 한 줄, 결정적인 잘못은 없지만 불성실한 부부 생활이 이혼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혼 법정에 선 부부 중 갈라선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이혼 청구가 받아들여진 165쌍이었다. 청구가 기각되거나 재판부의 조정을 통해 이혼을 하게 되면 이혼 사유가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이들의 이혼 사유를 보면 법률상 다섯 가지 이혼 원인(민법 840조) 중 ‘3호’와 ‘6호’가 합쳐진 경우가 전체의 49.1%(81쌍)로 가장 많았다. 3호는 ‘배우자 또는 그 부모로부터 심하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를, 6호는 ‘기타 혼인을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유가 있을 때’를 말한다.

이혼 과정을 보면 부부 한쪽이나 쌍방의 폭언과 폭행 등으로 갈등-부부관계 단절-별거 등을 거쳐 사실상 남남이 되는 게 일반적이었다. 부부 싸움이 물리적 충돌로 증폭되는 데는 생활비 등 경제 문제나 다른 이성과의 교제, 의처증(의부증), 도박, 술, 게임중독 등 다양한 원인들이 ‘촉매제’ 역할을 했다.

1호 사유, 즉 ‘배우자의 부정 행위’가 이혼의 주된 원인이 된 부부는 26.1%(43쌍)로 그 뒤를 이었다. 이 중 여성 배우자 쪽의 불륜이 문제된 것은 8쌍이었다. 30~40대가 몰래 외도하다 발각되는 사례가 많다면 50대 이상에선 버젓이 딴살림을 하다가 이혼 소장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다른 이성과 주고받은 휴대전화 문자메시지가 발각돼 불륜 사실이 드러난 사례는 판결문에 제시된 것만 7쌍이었다. 통화 기록이 외도를 뒷받침하는 주요 증거로 쓰이면서 재판 과정에서 이동통신사에 관련 자료 제공 요청이 폭넓게 이뤄지고 있다.

지난해 이혼 사유 중 두드러진 것은 6호 사유의 급부상이다. 대부분의 판결에서 2~3개의 이혼 사유 중 하나로 6호가 들어갔다. 6호 사유 하나 때문에 남남이 된 부부도 25쌍(15.2%)에 달했다. 김삼화 변호사는 “과거엔 소송 상대방의 책임이 분명할 때 이혼을 허용(유책주의)했으나, 최근 들어선 ‘더 이상 부부 관계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들면 이혼 청구를 받아들여주는 경향(파탄주의)이 강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조정 조서 91건을 분석한 결과 이 중 85건에서 이혼이 이뤄졌다. 부부 쌍방 간의 합의를 통해 이혼 조건을 정하는 특성상, 조건이 매우 구체적이었다. 한쪽 배우자 명의로 돼 있는 부동산에 대한 가압류를 상대편이 푸는 것과 동시에 재산분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재판을 전후해 형사 고소에 들어갔던 부부들은 이혼과 함께 간통이나 폭행 등 고소를 거둬들였다.

6쌍은 조정을 거치며 부부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조정 조서에는 ▶지금까지의 불화를 해소하고 부부로서 동거, 부양, 협조하기로 한다 ▶향후 어떠한 폭언이나 폭행, 부정행위도 하지 않는다는 등의 다짐이 담겼다. 돈 문제도 확실히 했다. 70대 부부는 “남편은 아내에게 1억원을 지급한다”는, 30대 부부는 “남편은 매달 25일 생활비를 주며, 절대 부정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합의 문구를 넣기도 했다.

권석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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