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석 칼럼]고양이 제 목에 방울달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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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한국의 당면한 정치.경제 난국 (難局) 은 불에 타고 있는 집, 중병 걸린 환자, 침몰하는 배, 지진이 진행중인 단층 (斷層) 구조,치명적 전염병이 창궐하는 도시 등 여러가지로 다르게 비유되고 있다. 필자의 감각은 전염병 쪽이다.

이 전염병의 병원체 (病原體) 는 낮은 생산성.높은 부채비율 (또는 높은 부실채권 비율) , 이 두 가지의 결합물이다. '주인도 감독자도 없는 은행' 현상과 '원화의 왜곡된 고평가' 지속 등 그른 규제와 제도가 병원체의 폭발적 증가를 위한 최적환경이 돼 주었다.

그 증상은 외환 (원화) 대란과 금융대란으로 지금 나타나 있다. 기업과 은행의 퇴출은 이 병에 의한 사망에 해당한다.

구조조정의 목적은 장기적으로는 낮은 생산성을 치료하는 데 있지만 급선무는 전염의 차단에 있다.구조조정으로 가는 첫째 계단은 부도난 기업의 퇴출처리다.

일단 부도를 내면 협조융자는 말할 것도 없고 화의.법정관리 등의 처리방식은 당면한 비상시기가 해제될 때까지는 정지돼야 한다. 인정머리 없는 소리지만 환자가 전염병으로 죽으면 그 시체는 급히, 그리고 깊게 매장하거나 화장해야 한다.

이것은 전염병의 확산을 막는 가장 기초적 조치다.이 난국에 죽은 기업을 살려내려고 가욋돈을 쓰는 것은 전염을 가장 빠르게 촉진할 뿐이다.

살 기업에 돌아가기에도 모자라는 자원을 죽은 기업에 낭비한다는 것이 이를 촉진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다. 최단기간에 주식 공매를 통해 법인을 인수.합병시키거나 또는 회사를 청산해 잔존가치를 공매해야 한다.

둘째 계단은 비용마련이다. 가장 큰 난관이다.

현재 1백조원대로 추산되고 있다. 퇴출하는 기업과 금융기관의 상환불능으로 남는 순채무에 대한 금전적 책임은 경영자.주주, 그리고 모든 직간접 채권자 순서로 지울 수밖에 없다.

간접적 채권자에게는 예금자도 포함된다.

지금부터라도 예컨대 연간 10% 이상 금리의 예금에 대해선 이자뿐만 아니라 원금에 대해서도 정부 보장을 취소해야 할 것이다. 납세자가 부담하는 순서는 맨 끝이라야 한다.

그러나 결국 납세자의 부담액이 전체 비용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될 것 같다. 이 억울함을 보상하려면 퇴출기업 경영책임자들의 횡령.사기.배임.직무유기 등 형사책임과, 관련기관 종사자의 수회혐의를 추궁해 응분한 배상액을 실현시켜야 한다. '한보 리스트' 와 '김선홍 리스트' 가 백일하에 공개돼야 함은 그 리스트가 먹은 돈을 결국 납세자가 부담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1백조원을 조달하는 정부예산 계획은 하루 빨리 확정해야 한다.

셋째 계단은 은행의 사업지배를 너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얼른 주주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구조조정은 언필칭 국내외 시장경쟁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경쟁이란 책임 있는 '주인' 들만이 벌일 수 있는 '신켄쇼부 (眞劒勝負)' 의 장 (場) 이다.지금처럼 '주인 없는 대리인' 만으로 경영하는 은행은 시장의 경쟁주체가 아니다.

이런 형편을 알면서도 궁지에 몰리면 해결방법을 시장에 돌리는 정부 당국자는 박쥐형 시장주의자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모든 퇴출자들이 사후 (死後)에 남기는 순채무의 대부분은 끝에 가서는 그때까지 아직 살아 있는 은행들의 장부에만 받지 못할 채권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한국 경제의 구조조정은 최후에는 은행의 구조조정이 되고 만다. 그런데 그때 가서야 은행이 구조조정을 시작한다면 그 때는 이미 비용에 눌려 필경 모든 은행이 회복하지 못할 경계선을 넘어 버린 다음일 것이다.

'주인 없는 은행' 은 살기 위한 최선의 구조조정을 할 동기가 없다. 군소주주.예금자.납세자의 부담과 이익은 은행의 구조조정 성패에 따라서 좌우될 판이다.

부실기업의 퇴출도 은행 자신이 살기 위해 벌이는 구조조정의 일환으로서만 강력하고 신속하게 진행될 수 있다. 만일 은행에 주인이 있었더라면 아마 한보.기아 문제는 지금처럼 처리를 미적거리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넷째 계단은 정 (政).관 (官) 의 제도개혁과 규제혁파다. 이것은 가장 쉬운 일이지만 지금으로서는 가장 어렵다.

고양이가 제 목에 방울을 다는 것에 비유할 만하다.한국의 정치.경제는 지금까지 정.관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고양이 앞에 다만 여러마리 쥐로서 있어 왔다.

구조조정은 이 넷째 계단을 출발점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런데 아직 이 고양이는 소리소리 지르며 잠꼬대만 늘어놓고 있다. 오늘 오후에 발표될 경제대책회의 결과를 한번만 더 기다려 보자.

강위석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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