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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장기판, 유모차 끄는 엄마들 100년 한옥마을과 정겹게 어울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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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호 31면

①600년 된 은행나무 인근의 한 골목길. 흙·벽돌 등 다양한 소재의 담장 너머로 리베라 호텔이 육중한 모습으로 서 있다. ②리베라 호텔 옥상에서 내려다 본 전주 한옥마을 전경. 한옥 크기와 모양이 제 각각이고 놓인 자리도 불규칙하다. ③태조로·은행로 등 마을 길을 걷다 보면 듬성듬성 마주치는 수퍼나 이발관. 이곳의 한옥은 새롭고 수퍼나 이발관은 오히려 예스럽다. 신동연 기자

지난 4월 그동안 이야기나 문헌상으로 익숙해진 전주 한옥마을을 처음 찾았다. 한옥마을의 중심에 위치한 중앙초등학교와 관련한 프로젝트를 맡은 것이 계기였다. 한옥마을의 매력은 마을을 이룬 한옥의 전통적인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옥 혹은 근대건축물을 개성 있게 개조한 카페와 문화공간들, 주민이 거주하는 소박한 한옥과 골목길의 풍경, 태조의 어진이 있다는 경기전 앞에 장기판을 두고 둘러앉은 할아버지들, 유모차를 끌고 시냇물이 흐르는 은행로를 산책 나온 아이 엄마 등등의 일상과 어우러져 공존하는 모든 것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사색이 머무는 공간 ⑫ 전주 한옥 마을

전통이라는 키워드가 한옥마을 전체의 메시지지만 전통과 근현대가 이질적으로 공존하는 현재의 모습들이 오히려 흥미롭다. 세련되게 이미지화된 전통보다는 그런 혼재가 전통이 무형의 가치로서 역동적으로 재해석되고, 현재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과 공존하는 전통의 아름다움
11일 오후, 관광객의 한 사람으로서 다시 한옥마을을 찾았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이곳을 어슬렁거려볼 요량으로 한옥생활체험관에 짐을 풀었다. 이곳은 사회적 기업인 사단법인 전통문화사랑모임에서 운영하고 있는 곳이다. 입구에 놓인 팸플릿과 안내판에는 마당에서의 연주회, 대청에서의 강좌 등 일년 내내 활발하게 벌어지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있었다.

숙소에서 제공하는 자전거를 타고 한옥마을의 탐사에 나섰다. 숙소에서 준 지도는 정감 어린 손그림으로 그려져 있었다. 60년 된 청수약국의 이야기며, 10대째 한집안이 살고 있는 삼백년가 수퍼의 이야기 등 마을의 작은 역사가 적혀 있어 호기심을 자극한다. 지도에 적힌 수퍼를 찾아 나서며, 한옥의 정취와 어우러지는 오래됨의 향기가 전통이라는 말로 정형화되기보다 감성적으로 와닿았다.

한옥생활체험관 주변은 동락원·승광제·아세헌 등 숙소로 이용되는 한옥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태조로를 향해 내려가다 보니 좌측으로 이들 한옥들 사이로 길게 난 골목길이 보인다. 아름다운 골목길은 흙담과 돌로 된 바닥 포장이 비교적 새것으로, 새로 정비된 길인 듯하다.

막다른 골목 끝 집의 지붕 위로 보이는 리베라 호텔의 현대적인 입면이 이곳이 민속촌이 아니고, 역동적인 도시의 변화 한가운데 있다는 점을 일깨워 준다. 주 진입로가 되는 태조로는 한옥마을을 중앙에서 관통하여 전주성의 남문인 풍남문으로 이어진다. 2차로의 화강석이 깔린 도로를 중심으로 경기전과 전동성당, 중앙초등학교 등 한옥마을의 랜드마크라 할 만한 규모의 건물들이 서 있다. 1914년 완공된 붉은 벽돌의 전동성당은 전주성을 허문 흙을 벽돌로 만들어 지었다. 근대도시 구조로 바뀌며 사라진 전주성의 흔적이 지금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으로 남아 한옥마을의 기와지붕 속에서 이국적인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다. 한 장소가 역동적인 역사를 드러내고 있었다. 전동성당과 태조로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의 경기전은 태조의 어진이 놓여 있는 사적이면서 밀도 있는 한옥마을에 여유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시민들의 휴식처이고, 이웃한 중앙초등학교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한다. 태조로의 중간 즈음에서 그와 직교하면서 한옥마을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은행로는 일방통행로로 조성해 넓어진 보행로에 길을 따라 흐르는 물길과 조경이 운치를 더해준다. 태조로와 은행로, 이 두 도로에 면해서는 다수의 한옥 혹은 근대건축물을 개조한 세련된 카페와 문화시설들이 위치한다.

원래의 이 길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 원형을 찾아보기는 어렵지만 세련된 풍경 사이사이에 언뜻언뜻 일상의 역사가 엿보이는 수퍼·약국·이발관의 간판이 정겨워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곧 자리를 내어주어야 할 듯 위태로워 보인다. 가이드북에서 가라는 대로 가지 않고 큰길보다는 샛길을 택해 들어가 봤다. 자전거는 큰길을 따라 달리다가 세련된 한옥마을의 보이지 않는 경계를 벗어나 어느새 낡은 한옥에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동네 이발관·떡집·점집 앞을 달리고 있다. 태조로와 은행로의 뒷길들엔 숨겨진 보물 같은 마당을 가진 소규모의 한옥을 개조한 상업시설들이 있었다. 일부 필지는 새로운 건축이 진행 중이고, 낡아서 비워져 있는 한옥도 눈에 띄었다. 이런 불연속적인 풍경은 변화의 기운과 함께 한옥마을의 잠재력과 불안감을 함께 제공한다.

거주민이 살기 좋은 곳이 우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첫 방문을 안내해 주었던 전주시청 전통문화과 조희숙 계장의 “한옥마을의 정비는 관광객만을 위한 기반시설이 아닌, 거주민의 환경을 개선하여 살기 좋은 장소를 만드는 것이 우선”이라는 설명이 떠올랐다. 전주시는 전면 보존이나 규제에 따르는 지역의 낙후와 민원 제기가 있었던 과거의 경험을 교훈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길과 환경시설물 같은 기반시설 정비와 개인의 환경개선에 대한 보조금 지원을 통해 개인들이 자발적인 개축이나 신축을 유도하고 있다. 자발적이고 점진적인 개발 유도다. 1930년대 지어진 개량형의 도시형 한옥이 원형 보존을 해야 하는 건축사적 가치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도시구조를 유지하며 탄력적으로 개발을 유도하는 시의 정책은 한옥마을을 활성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원칙이 불분명한 개조가 계속된다면 한옥마을의 가치가 지속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지속되고 보존돼야 할 가치에 대해서는 지역 주민과 지자체 등 관계자들의 합의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길과 필지의 도시 조직이든 일부 한옥의 개량 방식이든, 거주민의 변화이든 현재의 변화를 반드시 기록해야 한다. 개개의 한옥을 어떻게 개조했는지, 개조의 허용 범위 등이 기록되면서 비로소 가치의 전승이 가능하다.

오래전 일이지만, 필자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역사보존지구의 한 필지의 개조를 맡은 적이 있다. 시청에 그 필지의 기록을 요청하니 100년 전부터 그 당시에 이르는 청사진 뭉치를 내었다. 100년 전 건축가의 사인이 있는 도면을 본 후 그 건물을 함부로 고치겠다는 생각을 하기는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하룻밤을 보낸 한옥생활체험관의 일반실-2의 아침은 창호지로 새어 들어오는 빛과 새의 지저귐 소리로 시작됐다. 숙박시설, 상업시설 혹은 문화시설로 전용된 한옥들의 마당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중이다. 이 이야기들이 이곳에 오래전부터 이어온 이야기들과 자연스럽게 융화되는 점차적인 변화가 일궈지기를 바란다. 그래서 전주 한옥마을이 현재의 풍경이 가진 다양성을 새로운 미학으로 승화시키고, 현재 진행형의 살아 있는 전통 만들기를 지속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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