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난장 11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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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씨발.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똑바로 보자는데, 무조건 비관적으로 본다니까, 말문부터 막히는구만, 장돌뱅이로 둔갑하고부터 내 별명이 '다방지기' 란 걸 몰라? 장바닥에서 주워들은 풍월이란 말은 옳지만, 내가 조작한 말은 아녀. 아직도 뱃놈 땟국이 구질구질하단 말도 정곡을 찔렀어. 그런데 구질구질한 뱃놈은 세상 돌아가는 이치도 모른체하고 주둥이를 꾹 다물고 있어야 자네 입맛에 맞겠나?

요사이는 농촌에만 폐가 (廢家)가 생기는 게 아녀. 서울의 달동네에서도 폐가가 속출하고 있다는 것이여. 달동네 사는 사람들 모두가 하루 벌어서 하루 사는 막판 노동자들인데, 이 사람들이 맨 먼저 실직을 당하고 보니까. 남편은 남편대로 계집은 계집대로 어린 새끼는 새끼대로 뿔뿔이 흩어져서 풍비박산되니까 밤이 되면, 사람 없는 텅빈 집 마당에 달만 훤하게 비친다는 게여. 바닷가에 달 뜨면 강강술래나 추지, 달동네에 달 뜨면 배만 고파. 그 와중에 좆된 것은 한국의 남편들뿐이여.

진작부터 간도 쓸개도 다 내놓고 돈 버는 기계로 나섰지만, 이젠 그 기계조차 쓸모없는 것이 돼버렸어. 가진 놈들 착취에 휘둘리고 희생에 무너지기도 했지만, 지아비로서 구실이나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인정받아본 적은 남편들의 역사에는 없었지. 그래도 가정이란 울타리를 지켜가려고 충성봉사해 왔지만, 지금 와서 남은 건 좌절과 절망뿐이지 않나. 서울역광장에 나가서 뭔가를 기웃거리다가 자선단체에서 내놓는 라면 한 그릇으로 허기를 달래고 있는 개똥 같은 신세들이 돼버렸어.

그런데도 돈푼깨나 만진다는 계집들은 색허기가 들어서 모텔인지 몰래텔인지 그런데를 풀방구리에 생쥐 드나들 듯하면서 외간남자들과 간통질이나 일삼고 있다니 씨발. 세상 말세 되기 잠시 잠깐이지 뭔가. "

"나는 자네처럼 좆도 모른 것도 아는 척하는 교장선생은 아니지만, 우리 경제가 시방 거품을 빼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모두들 겪는 고통들이 아닌가.

자넨 거품이 뭔지 아직 잘 모르는 것 같은데, 거품이란 밥 짓는 밥솥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이해가 빠르지. 밥솥에 한참 불을 지피다보면 밥이 끓어서 거품이 솟아오르는데, 그때 솥뚜껑을 열어보면, 쌀은 정작 익지도 않았지만, 흡사 밥이 한 솥 가득한 것처럼 보이지. 그게 바로 거품경제란 것이야. 미련한 작자라면 옳구나 하고 설익은 밥을 그릇에 담기 시작할 테지.

그러나 끓어오르던 거품이 가라앉고나면, 채 익지도 못한 쌀이 아직 솥바닥에 깔려 있겠지. 그러나 당황하지 않고 한불을 빼고 천천히 불을 때고 있을라치면, 밥은 그때부터 익기 시작하는 것 아닌가.

조급증을 내지 말고 진득하니 기다리면서 불을 때주다가 이제야 됐다 싶을 때 솥뚜껑을 열어봐. 바닥에 깔려 있던 쌀이 모두 익어서 솥뚜껑이 들썩하도록 밥 한 솥이 그득하게 담겨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지금 당장 우리가 겪고 있는 고초는 끓어올랐던 밥거품이 가라앉을 동안 겪는 고통이야. 사정이 그렇다면, 지금은 누굴 원망하거나, 과거의 잘잘못을 탓하고 그 사람들을 감옥에 처넣는 일에 열중할 것이 아니라, 거품이 제대로 가라앉는 것인가 밥이 제대로 익어가고는 있는 것인가를 꼼꼼하게 살필 때라는 게야. 그러니 자네도 다방지기는 잠시 쉬기로 하고 내일 출항하는 배나 타자구. 이제 막 오징어 첫물이 올라올 시기가 되었잖나. " 시무룩해서 듣고 있던 변씨는 그러나 고개를 내저었다.

"자네들도 알다시피 그깐 채낚기 타봐야 손바닥만 부르트지. 허리가 부러져라 하고 자새질 해서 주둥이 삐뚤어진 오징어 몇 마리 낚아봐야 남는 건 먹물 뒤집어쓴 쌔까만 몰골 한가지뿐이지 않나. 내가 왜 또 그 짓을 자청하겠나. 어디 그뿐인가. 젊은 놈들과 자리 다툼하다가 떠밀려서 물귀신 되기 십상이지. 장돌뱅이 행세하면서 여기저기 쏘다녀보니까, 속시원하고 손바닥 아프지 않아서 좋기만 하데. 그런 말 두 번 다시 하지 말어. "

"쪼 빼지 말고 같이들 나가. 당일발이니까 끽해야 하룻밤 아닌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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