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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대로 따라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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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해방 이후 우리나라의 중심세력은 미국파였다. 물론 건국 직후 인재가 모자라던 시절 고육지책으로 일본파가 중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나라의 틀이 갖춰지면서 우리나라의 발전을 주도해온 세력은 누가 뭐래도 미국파였다. 1960년대 이후 미국에서 공부한 군인.정치인.경영인.학자들이 사회 각 분야의 주역이 됐다.

자연스레 미국 배우기가 유행했다. 학자들은 미국의 사상과 제도를 가르쳤고, 기업들은 미국식 자본주의를 실천했다. 그래서 미국적 가치, 예컨대 자유 민주주의나 시장경제.합리주의.실용주의 등이 우리 가치체계의 윗부분에 자리잡았다. 한마디로 미국은 우리에게 절대선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 구도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반미정서의 확산과 함께 미국은 물론 미국적 가치를 무조건 배척하려는 풍조까지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고 미국파가 구축한 거대한 정치-경제-학계의 복합체가 깨진 것은 아니다. 같은 외국 박사라도 아직은 미국 박사라야 행세를 한다. 미국이 어떠네 하면서도 아들.딸 미국에 유학 보내는 것은 이 틀이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새 주역이 된 좌파들은 이제 미국 대신 유럽을 배우려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독일을 배우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 정부가 내놓은 각종 로드맵(일정표)이나 정책을 보면 잘 드러난다. 하기야 '약탈적'이라고까지 불리는 미국 자본주의를 답습한 우리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분배의 정의가 웬만큼 실현된 독일식에 눈 돌릴 때도 됐다.

독일의 정치.경제.사회 체제는 흔히 '사회적 시장경제'로 표현된다. 요즘 다소 변하긴 했지만 아직도 독일 노동자는 세계에서 가장 적게 일하고, 가장 많은 월급을 받으며, 가장 휴가가 길다. 한마디로 노동자 천국이다. 노동자 권익을 중시하는 좌파 입장에서 이보다 좋은 모델이 없다. 노사 문제뿐만이 아니다. 지난번 총선 때 처음 도입된 1인2표제도 순전히 독일산이다. 이 정부가 심혈을 기울이는 지방분권화, 나아가 수도 이전 추진에도 독일 따라하기의 흔적이 역력하다.

물론 독일 따라하기가 지금 처음 시도되는 것은 아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패전의 잿더미에서 라인강의 기적을 일으킨 독일처럼 한강의 기적을 만들고 싶어했다. 잘 사는 독일 농촌을 보고 새마을운동을 구상했고, 아우토반을 보고 고속도로를 건설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통일을 달성한 독일의 노하우를 배우려 했다. 남북 정상회담은 독일에서 배운 바가 많다.

이처럼 두 전 대통령은 독일에서 경제발전과 남북문제를 주로 배우려 했다. 그러나 이 정부는 포괄적으로 독일을 배우려 한다는 인상이 강하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독일을 좀 제대로 배우라는 것이다. 경제발전은 배웠지만 민주주의는 외면했고, 북한을 지원했지만 독일처럼 북한의 인권문제와 연계시키지는 못했던 두 전 대통령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뜻이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수도 이전 문제가 특히 그렇다. 91년 독일 의회가 본에서 베를린으로 천도하기로 결정한 가장 큰 이유는 베를린이 독일의 미래에 부합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곳이 통일을 앞둔 우리 민족의 앞날에 어울리는지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는 말이다.

의문사위 문제와 관련해서도 독일의 예는 시사하는 게 많다. 독일 통일의 기초를 닦은 브란트 전 총리는 비서가 동독 간첩이란 사실이 드러나자 두말없이 사임했다. 또 통일된 지 14년이 지났지만 과거 동독 비밀경찰인 슈타지의 끄나풀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누구나 사회적으로 매장된다. 독일에서 간첩 출신이 군사령관을 조사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유재식 문화.스포츠 담당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