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하시모토의 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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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요즘 일본 정가에는 수상쩍은 기류가 흐르고 있다. 하시모토 류타로 (橋本龍太郎) 내각의 운명을 둘러싼 갖가지 소문들이 꼬리를 물고 있다.

첫번째 나타난 이상징후는 친 (親) 자민당 색채가 짙은 신문과 방송들이 하시모토 총리의 리더십이 땅에 떨어졌다며 그를 비판하는 기사를 연일 게재하거나 전파에 흘리고 있다. 언론들이 앞다퉈 내보내고 있는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현직 총리에 대한 국민의 지지율은 갈수록 최저를 기록하고 있다.

두번째는 총리를 떠받쳐주어야 할 자민당내 주요 실력자들이 그의 퇴진론을 전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후생상은 최근 복지예산 책정을 둘러싸고 총리에 도발함으로써 내각수반의 체통을 크게 일그러뜨렸다. 지난해 12월에는 농림수산상이 한.일어업협정을 폐기하지 않을 경우 사임도 불사하겠다며 총리를 위협하는 전례를 남겼다. 장관들은 총리보다 자신들의 정치 생명을 우선순위에 올려놓았다.

세번째는 재계가 이미 총리로부터 등을 돌렸다. 전통적으로 자민당 지지세력인 게이단렌 (經團連) 과 집권세력과의 대화 통로가 얼어붙었다. 대기업 총수들마저 공공연히 총리 퇴진을 요구할만큼 분위기가 악화되었다.

하시모토 정권의 위기는 일본의 위기에 그치지 않고 아시아의 위기로 확산될 요소가 다분하다. 일본의 불안한 경제정책은 주변국가의 시장을 더욱 냉각시킬 것이다. 하시모토 총리가 벼랑으로 몰리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공약으로 내걸었던 재정.행정.경제구조 개혁 등의 좌초에 연유한다.

특히 재정적자 축소 방침은 대규모 경기부양대책으로 인해 정책의 뼈대를 바꾸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몰렸다. 더욱 운이 나쁜 것은 하시모토의 경기부양책이 발표될 때마다 시장은 오히려 뒷걸음질만 했다. 약을 써야 할 시기가 지나 효험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는 양쪽에서 엄청난 정치적 실점 (失点) 을 받았다.

그를 총리관저에서 몰아내려는 야당의 공격은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대일 (對日) 무역적자폭이 확대되고 있는 미국으로부터의 압력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자민당 내부에는 총리를 확실하게 밀어주는 그의 파벌조차 없다. 부정부패의 집단으로 지탄받고 있는 대장성 관료들의 침묵은 총리를 더욱 외롭게 만들고 있다. 러시아 및 중국 등과 쌓았던 외교 득점도 모두 잠식돼버렸다.

국민이 하시모토 총리를 불신하고 있다는 증거는 시장에서 나타난다. 주민세나 소득세를 아무리 낮추어도 감세 (減稅) 분이 소비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장롱속으로 들어간다. 국민들의 의식 밑바닥에는 장래에 대한 불안과 시장경제의 충격이 엉켜있다. 일본 국내총생산의 60%를 차지하고 있는 소비 위축은 정치가 풀어야 할 최대의 현안이다.

실업자 2백77만명이라는 통계가 현 내각에 주는 정치적 압박감은 엄청나다. 3월결산기업의 영업성적이 나오는 5월중 금융.건설업을 중심으로 한 도산사태가 이어진다면 하시모토 총리는 정치적 책임을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된다. 설령 그 시기가 늦춰진다 하더라도 7월 예정인 참의원 선거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만약 그가 중의원.참의원 동시선거라는 비장의 카드나 일부 야당세력과의 연합으로 돌파구를 찾는다 하더라도 국민의 신뢰를 되찾지 않고서는 장기정권 수립은 불가능한 일이다.

정책관련 연구소와 기업들도 하시모토 총리의 퇴진이라는 시나리오에 대비하고 있다. 만약 그 시기가 현재 우려되고 있는 미국의 버블경기 붕괴와 겹친다면 최악의 상황을 헤쳐나갈 일본의 차기 대권자가 누구인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일본의 정국은 정치.정치인에 대한 불신이 시장의 불안이라는 악순환을 낳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에 시사하는 바 적지 않다. 일본인들은 어지간해서는 상대방을 '바보' 라고 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는 정치인들을 가리켜 '바보들의 집단' 이라고 서슴없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다. 떠들썩하지 않고 분노하지도 않는 일본인들의 스트레스는 흥분 잘하는 한국인들의 스트레스에 못지 않다.

최철주 〈일본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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