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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시대의 유학생] 상.'헝그리정신'되살아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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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미 뉴욕 퀸즈버러 서니사이드 40번가 (街) 오전3시10분. 잠이 없다는 노인들도 아직 잠자리에 있을 시간에 뉴욕공대 2년생 이준영 (李晙榮·25) 군은 자취방을 나선다.

새벽잠의 유혹을 뿌리치며 그가 향하는 곳은 걸어서 10분거리에 있는 한 교포 신문사.

그는 이곳에서 성순호 (成洵昊·29) 씨 등 다른 유학생 3명과 함께 신문발송 업무를 돕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오전3시30분부터 8시30분까지 하루 5시간씩, 주 6일 근무하고 받는 돈은 약 1천달러. 이 돈으로 단칸방 월세 (3백50달러) 와 책값·생활비를 충당하고 약간의 저축까지 한다.

한국의 부모가 보내주는 '향토 장학금' 에만 의존해왔던 그가 직접 생활전선에 뛰어든 것은 물론 IMF 한파 (寒波) 때문. 대구에서 조그만 사업을 하는 부친이 경기침체·환율상승으로 송금에 어려움을 겪자 연 1만달러 정도의 학비를 뺀 다른 돈은 직접 벌어 해결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피곤한 건 사실입니다. 오전수업이 있는 화·목요일엔 집중력이 다소 떨어지고요. 그렇지만 참고 견뎌야죠. 공부하면서 돈 벌기가 쉬울리 있겠어요. "

李군은 새벽근무가 힘은 들지만 공부시간을 내기에 유리하고, 식당·가게 종업원과 달리 직접 손님을 상대하지 않는 일이라 정신적으로는 더 편하다고 말했다.

일본 도쿄 (東京) 교린 (杏林) 대학의 4학년 학생들인 K (32) 씨와 그의 부인 J (30) 씨는 둘 다 부업으로 학비·생활비를 조달한다.

빠찡꼬 업소 (K씨) 와 한국식당 (J씨)에서 하루 7시간씩 일해 두 사람이 버는 돈은 월 30만엔 가량. K씨는 "졸업후 빠찡꼬 업소의 정식 직원으로 취업해 돈을 벌고, 아내부터 대학원에 진학시킬 예정" 이라고 말했다.

부인 J씨가 먼저 공부하는 이유는 남편이 근무하는 빠찡꼬 업소가 직원들에게 숙소를 무료로 제공하는 덕에 생활비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IMF사태로 고국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전세계에 나와 있는 유학생 사이에서 50~70년대의 '헝그리 정신' 이 되살아나고 있다.

막연한 동경심이나 과시욕 때문에 나왔던 '껍데기' 유학생이 많이 돌아갔지만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소신파·학구파들은 고학하거나 피눈물 나는 내핍생활로 어려움을 이겨나가고 있다.

뉴욕주립대의 스토니브룩 캠퍼스에 다니는 鄭모 (31·컴퓨터프로그램 전공·석사과정) 씨의 경우 IMF 이후 매일 점심을 거르고 강의가 끝난 뒤 집에 가 오후 늦게 점심 겸 저녁을 먹고 있다. 예전에는 대학가에 있는 피자집 등지에서 아내와 함께 가끔 외식도 했으나 요즘은 꿈도 못 꾼다.

본국의 부모로부터 받는 송금액이 올들어 월 2천6백달러에서 2천달러로 줄어 든 때문이다. 鄭씨는 "아파트 월세 (8백달러) 와 네살배기 아들 육아원비 (4백달러) 등 고정비를 제외한 비용중 줄일 수 있는 비용은 다 줄였고 이제 손댈 곳은 식비만 남았다" 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해서 한달에 4백달러 가량 절약한다. 미국 대학의 캠퍼스에서는 점심값을 줄이려고 주먹밥이나 샌드위치 도시락을 집에서 싸와 한국 유학생끼리 둘러앉아 함께 먹는 광경이 흔히 목격된다. 보통 1달러인 자판기 음료수가 비싸다며 인근 할인점에서 콜라 등을 싸게 사다놓고 등교할 때 가방에 넣고다니는가 하면, 유학생 상대의 식품점에서는 라면이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다.

집세 부담을 덜기 위해 룸메이트를 들이는 것은 보편화됐고, 심지어는 부부 유학생이 자신들의 아파트 방 1개를 비워 다른 세입자를 들이는 경우도 있다. 여름방학을 앞두고 각 대학 취업상담실에는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한국 학생들의 신청이 쇄도하고 있다.

프랑스 파리의 유학생들 사이에는 한국의 경제위기와 이로 인한 어려운 사정을 구구절절이 설명한 뒤 집세를 깎아달라고 호소하는 편지를 집주인들에게 보내는 일이 적지않다. 이런 방법으로 일부 유학생들은 집주인들로부터 집세 인하의 특혜 (?) 를 받기도 했다.

미 컬럼비아대 법대의 노정호 (盧廷鎬) 교수는 "IMF 이후 유망한 학생들이 학업을 중단하고, 남아 있는 학생들도 고생하는 등 안타까운 일이 많다" 며 "그러나 학생들의 정신상태가 더욱 건전해지고, '놀러온 학생' 과 '공부하러 온 학생' 간에 차별화가 이뤄지는 긍정적 효과도 나타나고 있다" 고 진단했다.

뉴욕·파리·도쿄 = 김동균·배명복·오영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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