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 크고 능력 있는 노총각의 결혼, 그럼 우린 어쩌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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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호 06면

시작도 안 한 드라마에 ‘초 치는 것 같아’ 미안하긴 하지만, 일본 드라마 ‘결혼 못 하는 남자(결못남)’가 한국판으로 리메이크된다는 소식이 전혀 반갑지 않았던 사람 중 하나다. 일드(일본 드라마) 리메이크 열풍에 반감이 있다거나, 한국판 주인공을 맡은 지진희와 엄정화가 특별히 싫어서는 아니다. 단지 2006년 후지 TV에서 방영된 일본판 ‘결못남’의 두 주인공 배우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누구도 그들을 대신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됐다고 할까. 특히 제멋대로에 괴팍하기 그지 없는 마흔 살의 노총각 건축가 구와노 역할은 이 남자, 아베 히로시(45·사진)가 아니면 안 된다고 떼를 쓰고 싶을 정도다.

이영희 기자의 코소코소 일본문화

주변의 ‘일드 좀 본다’는 이들을 보면, 아베 히로시의 팬이 꽤 된다. 기무라 다쿠야가 일드로 진입하는 문을 열어주는 배우라면, 아베 히로시는 일드의 깊은 재미를 알려주는 배우라 할 수도 있겠다. 그의 출연작들을 좇다 보면 추리에서 로맨스·코믹·사극까지 정말 다양한 장르의 ‘괜찮은 드라마들’과 만나게 된다.

“파파데쓰용~(아빠예용)”이라며 아들에게 애교를 떨던 ‘히어로’의 코믹한 검사에서 현재 후지 TV에서 방영 중인 ‘하얀 봄’의 은퇴한 야쿠자 역까지, 그 어떤 작품에서도 그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무한 신뢰’를 주는 배우가 아베 히로시다. 그의 능청스러운 호연 덕분에 뻔한 로맨틱 코미디 얼개를 가진 ‘결못남’ 역시 ‘연애뿐 아니라 사람이 보이는’ 수작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실은 장동건처럼 ‘얼굴이 지나치게 잘생겨 슬픈 배우’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대학생이던 1985년 일본 인기잡지 ‘논노’의 ‘보이프렌드 대상’에서 우승하며 연예계에 입문한 아베 히로시는 이후 잡지 ‘맨즈 논노’의 표지모델로 43회 연속 등장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당대 최고의 ‘꽃미남’이었다. 하지만 이후 출연한 몇몇 영화에서 그는 “얼굴만 잘생긴 재능 없는 연기자”란 혹평을 들으며 사람들의 관심에서 차츰 멀어지게 된다. 이후 2000년 드라마 ‘트릭’에서 코믹한 역할로 변신해 주목을 받기까지, 오랜 기간 색깔 없는 배역들을 전전하며 조연 배우로 살아왔다.

“서른이 넘어서야 일이 풀리는 바람에 결혼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는 그는 ‘결못남’에 출연하던 당시까지 미혼이었다. 노총각을 연기하는 배우가 실제로 마흔 넘은 싱글이라는 사실이 드라마에 현실감을 더했다. 상대역 노처녀 여의사 역할의 나쓰카와 유이 역시 30대 중반의 미혼이었기에 “두 사람이 연결됐으면” 하고 기원하는 드라마팬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아베 히로시는 2008년 15살 연하의 일반인 여성과 결혼을 전격 발표, ‘결못남’ 대열에서 당당히 탈퇴했다.

‘결못남’에 대한 네티즌 리뷰를 둘러보다 눈물이 앞을 가리는 사연을 하나 발견했다. 34세 미혼남성이라는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 “구와노는 키도 훤칠하고, 돈도 잘 버는 건축가니까 마흔 넘어도 결혼할 수 있겠죠. ‘호빗족’ 혈통에 직장도 구린 저는 결혼은커녕 앞으로 살 길조차 막막합니다”라는 소감을 올렸다. ‘독거중년’을 바라보는 동지의 한 사람으로, 요즘 인터넷 최고 유행어를 빌려 그에게 작은 위로(?)를 건네고 싶어진다. “내가 ‘결못남’ 보면서 느낀 건데, 결혼하려면 직업이 빵빵하거나 적어도 호빗족은 아니어야 될 거 같아. 근데 우리는 통장 간결하고 외모 겸손하잖아. 우린 안 될거야, 아마.”


중앙일보 문화부에서 가요·만화 등을 담당하고 있다. 아이돌 그룹 ‘스마프(SMAP)’를 향한 팬심으로 일본어·일본 문화를 탐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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