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일본의 브란트'를 기다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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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한 한국.대만.필리핀.일본의 국회의원들간 교류 및 협력증진 방안을 표출하는 '전후 배상문제에 대한 의원회의' 가 지난 21일과 22일 이틀에 걸쳐 일본 도쿄 (東京)에서 열렸다.

한국에서는 이미경 (李美卿) 의원과 필자가 참석했고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대표해 김윤옥.지은희씨가 참관했다.

이번 회의 벽두에는 범죄자 명단 발굴, 일본전범의 출입국금지법안 입법화, 유엔 국제형사재판소 설립, 2000년 아시아 여성재판소 개정을 위한 준비,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네트워크 형성이 논의됐다.

특히 일본의 국민기금 해산과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제정을 촉구한 제5차 아시아연대회의 (4월16~17일 서울개최) 의 성과가 보고됐다.

이번 의원회의의 목적은 그동안 아시아 각국에서 벌어진 군대위안부 문제에 관한 시민단체들의 노력과 성과를 각 나라 의회를 통해 구체적으로 입법하고 각국 정부가 피해여성과 시민단체의 요구를 수용하도록 압력을 넣자는 것이었다.

한국 대표단은 28명의 의원들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 연구모임' 을 결성했음을 보고했다. 또 일본측의 국민기금 철회, 일본 정부 차원의 법적배상.명예회복조치가 조속히 실현돼야 한다는 인식아래 지난해 11월 비인도적 범죄를 행한 일본군 전범에 대해 대한민국 입국을 금지하도록 출입국관리법을 개정했음을 알렸다. 또 한국정부가 피해자들에게 먼저 보상금을 지급하고 나중에 일본정부로부터 배상을 받아내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는 보고도 했다.

회의를 진행하는 도중에 전달된 한국 정부의 조처는 회의 분위기를 한껏 고양시켰다. 새 정부는 일본측의 이른바 '국민기금' 을 막기 위해 피해자 한 사람당 3천8백만원씩의 지원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앞서 대만정부는 지난해 12월 같은 조처를 취한 바 있다. 이제 국민기금은 그 존립근거를 상실했다.

참석자들은 한결같이 피해당사자들을 돈으로 매수해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 국가사죄와 배상을 회피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국민기금은 해체돼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회의를 끝낸 참석자들은 국민기금해체를 요구하는 요청서를 일본 외무성 관리들을 통해 일본 총리와 각 정당대표들에게 전달했다. 이 자리에서 외무성 관리들은 앞으로도 국민기금을 피해자여성들에게 은밀한 방법으로 계속 전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들은 이미 필리핀 26명, 한국 7명에게 전달한 것말고도 현재 70여명과 교섭하고 있다는 것을 밝혔다.

이에 대해 참석자들은 나라별로 구체적인 신원을 밝힐 것을 요구했지만 외무성 관리는 이를 거절했다. 이에 대해 한국과 대만 참석자들은 일본측이 각 나라의 주권을 무시하고 개개인에게 국민기금을 전달하는 것은 한국과 대만정부의 조처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일본 정부가 아시아의 '선량한 이웃' 이 되기에는 아직 요원하다는 것이 참석자들의 하나같은 느낌이었다. 전후 독일은 피해국과 그 국민들에게 철저히 사과하고 배상을 실시하며 후세들에게도 역사를 올바로 가르쳤다.

전후 독일의 이러한 자세가 유럽대륙에 신뢰를 구축하고 궁극적으로 단일유럽연합의 출현과 단일유럽통화체제 실현의 초석 (礎石) 을 다졌다는 것을 일본은 유념해야 할 것이라는 점도 지적됐다.

왜 아시아인들은 폴란드의 바르샤바 추모비 앞에 경건히 무릎꿇고 앉아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독일의 브란트 총리와 같은 인물을 가질 권리가 없는가. 그럼으로써 아시아인들의 자존심과 인류애를, 아시아공동체를 고양시킬 기회를 왜 가질 수 없는 것일까. 이런 문제의식을 제기하며 우리는 회의를 마쳤다.

이부영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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