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깊이 읽기] 비명에도 무관심한 나, 너, 우리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4면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
 스탠리 코언 지음, 조효제 옮김
창비, 664쪽, 3만5000원

1998년 당시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에게 한 기자가 물었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믿는 인권가치가 유럽인들이 생각하는 인권가치와 같은 것인가?”

질문의 의도는 분명치 않다. 저개발 국가의 수준 낮은 인권 관념을 비아냥거리는 말일 수도 있고, 서구적 문명가치를 ‘보편성’이란 이름으로 강요하는 건 문화 상대주의적 입장에서 옳지 않다는 지적일 수도 있겠다. 이 질문에 대해 아난은 “차라리 르완다의 어머니에게 암살대가 자기 아기를 죽일 때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 물어보라”고 답했다고 한다. ‘인권’이란 어떤 보편적 기준의 문제라기보다 즉각적인 감정과 공감의 문제라는 응수다. ‘인권’이 ‘인간의 권리(human rights)’라면 ‘권리’라는 법적 용어에 얽매일 게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 그 자체를 성찰해야 한다.

책은 20세기의 국가 폭력이 자행한 숱한 대량 학살과 인권침해 사례를 적시한 단순한 역사서가 아니다. 학살당한 시체는 있으나 살해자도 목격자도 없다. 국가 권력은 범죄를 부인(否認)하고 대중은 외면한다. 저자는 이 침묵의 정치와 망각의 역사를 해명하려 한다. 자기 마을에 생긴 강제 수용소에서 수 천 명의 유대인들이 죽임을 당하고 불태워졌지만, 그 사실 자체를 알지 못했다고 하는 평범한 주민들의 심리 상태는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인종적·정치적 문제가 복잡하게 얽힌 역사적 비극뿐만이 아니다. 1964년 뉴욕에서 한 여성이 강도들로부터 구타당해 숨질 때까지 40여 분이나 사투를 벌였으나 이를 목격하거나 비명소리를 들은 최소한 38명의 동네 주민들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대중사회적 병폐 탓일까? 그러면 가정 폭력에 대한 침묵과 은폐는 무엇 때문인가.

저자는 이 끝없는 봉인(封印)과 부인의 자물쇠를 열고자 정신분석학·인지심리학·범죄사회학 등 다양한 학문을 동원해 해답의 ‘열쇠’를 맞춰본다.

하지만 결론은 단호하다. 인권문제엔 학술적 ‘해명’보다 양심적 ‘행동’이 더 다급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사진작가 돈 매컬린의 글을 책의 끝무렵에 ‘결론적’으로 짧게 인용했다. 전쟁고아가 된 아프리카 소년, 그것도 백피증에 걸려 같은 처지 아이들로부터도 따돌림을 받는 알비노 소년을 봤을 때의 느낌을 쓴 글이다. 감정은 요약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부분(601~603쪽)은 직접 읽어보길 바란다.

영국 런던정경대학(LSE) 명예교수인 저자는 평생을 국가 권력의 폭력성과 지식인 사회의 위선에 대해 투쟁해 온 전투적 학자다. 남아공 출신인 그는 ‘백인’이었지만 흑백차별 철폐를 부르짖었고, 이스라엘로 ‘귀향’해선 유대인이었지만 팔레스타인 주민 고문·학살을 고발했다. 그리곤 이스라엘 ‘진보진영’의 침묵에 분노해 조국을 떠났다.

배노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