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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우덕의 13억경제학] 천안문 타임캡슐을 열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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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천안문(天安門). 중국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주는 '타임캡슐'같은 곳입니다. 이 문을 통과하면 고대 황실인 자금성(紫禁城)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옛날 황제들은 친정(親征)에 나설 때 천안문을 이용했습니다. 전쟁에 이겨 돌아올 때도 천안문으로 들어왔습니다. 개선문이었지요. 황제 즉위식도 그 곳에서 치러 졌습니다.

천안문 광장 한 복판에는 제가 '중국 조형물 중 가장 예술적인 작품'으로 꼽은 인민영웅기념비가 있습니다. 이 비각은 사정 직전 남근(男根)을 연상케 합니다. 그만큼 힘이 솟구치고 있습니다. 그 뒤로 마오쩌둥(毛澤東)이 잠들어 있는 마오쩌둥 기념관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또 광장 왼편에는 중국 정치 1번지인 인민대회당이 버티고 있지요.

천안문 뒤가 중국의 과거라면, 그 앞은 중국의 현재인 것입니다.

1949년 10월 1일.

수 만의 군중들이 천안문 앞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마오주시 완수이(毛主席萬歲)'를 목이 터져라 외쳤습니다. 그들이 부르짖던 마오주시(마오쩌둥)이 이날 천안문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했습니다. 인민들은 인민 군대인 인민해방군이 인민을 해방시켰다는 것에 열광했습니다. 마오는 국부(國父)였습니다. 마오는 그 옛날 황제가 그러했듯, 천안문에서 '황제 즉위식'을 갖졌습니다.

그후 그는 정말 황제처럼 살았지요.

1958년 말.

대약진운동을 진두지휘하고 있던 마오쩌둥에게 고민이 생겼습니다. 곧 다가올 신중국 건국 10주년 기념식을 어떻게 치러야 할지를 생각했던 겁니다. 화려하고, 위대하게 치러야 했습니다. 그는 광장을 만들기로 합니다. 소련 레닌그라드나, 미국 워싱턴 광장을 능가하는 넓은 광장을 만들어 신중국 10년의 위용을 자랑하겠다는 생각입니다.

1만2천여명의 '자원자'들이 공사에 투입됐답니다. 3교대로 작업이 이뤄졌습니다. 그들은 지쳐 쓰러질 때까지 위대한 혁명 완수를 위해 일했습니다. 소련의 기술자들이 불가능하다고 했을 때 그들은 해냈습니다. 이듬해 9월 중국은 천안문 앞에 있던 또 다른 누각인 다칭먼(大淸門)을 헐어버리고 넓은 광장을 만들었습니다.

다칭먼 뿐만 아니었습니다. 베이징 자금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이 허물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교통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였습니다. 또 소련이나 미국의 핵공격을 피하기 위해 지하 방공로를 건설해야 하는데 성곽이 방해가 됐습니다. 마오쩌둥은 과감하게 철거를 명령했습니다. 성벽 철거 후 그 곳에는 대로를 만들었지요. 베이징의 제2순환도로(二環)은 그래서 탄생했습니다. 지금도 제2순환도로에는 시즈먼(西直門) 푸싱먼(復興門) 등 옛 성곽의 이름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 성곽이 계속 남아있었더라면 베이징은 더 아름다운 역사의 도시가 됐을 겁니다.

1959년 10월 1일.

천안문 광장에는 수 만 군중이 운집했습니다. 마오쩌둥은 천안문 누각에서 후루시초프와 나란히 서 군중들의 환호에 답했습니다. 위대한 사회주의 건설을 세계 만망에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마오쩌둥이 섰던 자리는 서서히 허물어지지 시작했습니다. 그의 정치력에 위기가 오고 있었던 것이지요. 대약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옆에 있던 '맹방'의 원수 후루시초프와는 되돌아올 수 없는 대결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1966년 가을.

천안문 광장을 휩쓴 또 다른 군중의 물결이 있었습니다. 바로 홍위병들이었습니다. 문화대혁명이 터진 것이지요. 붉은 완장을 차고, 마오쩌둥(毛澤東)어록을 손에 든 학생들이 '자오판요우리(造反有理·뒤집어엎는 것은 정당하다)'를 외쳤습니다. 기존의 모든 질서를 부정, 파괴하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기존 질서를 파괴하고 다녔습니다. 사찰의 불상은 목이 떨어져 나갔고, 사당의 현판들은 뜯겨져 나갔습니다. 학교는 파괴되었고, 많은 문화유산이 약탈되거나 불에 타 사라졌습니다. 지식인들은 홍위병들의 죽창에 찔려 하나 둘 죽어갔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당시 국가주석이었던 류샤오치(劉少奇)마져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홍위병들은 그를 질질 끌고 다니며 구타하고, 똥물을 먹이고, 잠을 재우지 않았습니다. 그의 부인 왕광메이(王光美)는 이름에 미국을 뜻하는 '美'자가 들어갔다는 이유로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몰려 온갖 고초를 당하다 감옥으로 끌려갑니다. 문혁은 그렇게 중국의 모든 것을 파괴했던 겁니다.

숨가쁘게 역사의 시계가 돌아갑니다.
마오가 죽고,
사인방(四人幇)을 축출하고,
덩샤오핑이 등장하고,
개혁개방이 시작되고...

1984년 10월 1일.

또 다시 군중이 몰렸습니다. 건국기념일 행사였습니다. 천안문 광장에서 덩샤오핑이 무개차를 타고 나옵니다. 군 사열을 받기 위해서지요. 그리고는 대학생들도 사열 대열에 참여합니다. 그런데 돌발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대학생 무리가 덩샤오핑 앞을 지날 때 플랭카드를 들어 올린 겁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있었습니다.

 '샤오핑닌하오(小平닌好)'

 '덩샤오핑 동지, 안녕하십니니까?"라는 뜻입니다.

 베이징대학생들의 작품이었습니다. 그만큼 개혁개방의 설계사 덩샤오핑의 인기가 높았습니다. 비판의식 강하다는 베이징대학생 마져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을 추종했으니까요.

그러나 누가 알았겠습니까? 불과 5년 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인물(덩샤오핑)이 인민을 대상으로 대학살 명령을 내릴지 말입니다.

1989년 6월 4일.

천안문 광장은 피비린내가 요동쳤습니다. 광장에는 포연이 가시지 않았고, 탱크와 군이 분주하게 오갔습니다. 많은 이들이 죽었습니다. 천안문 사태였습니다. 흉물스런 탱크가 천안문 앞에 진을 쳤지요. 현장 동영상은 이미 지난 칼럼을 통해 보셨을 것입니다. 혹 보지 못하셨다면 다시 들려보세요( http://www.youtube.com/watch?v=zvAMwxevKp0 )

역사는 멈추지 않습니다. 천안문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왔고, 또 갔습니다.

1999년 5월 나토(NATO)군의 유고주재 중국대사관 폭격에 항거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그 해 10월 1일 짱저민 주석이 건국 50주년 군 사열을 받았습니다.
2008년에는 베이징올림픽을 보려는 수 많은 관광객이 천안문 광장에 모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천안문은 오는 10월 1일 또 다른 대형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바로 60주년 기념행사입니다.

천안문 '타입캡슐'에는 지금도 새로운 역사가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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