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서울시내 주요 대학 학생들은 한목소리로 대일 국교 정상화 교섭의 반민족성과 몰주체성을 성토하며 거리로 나섰다. “공화당 정부가 내걸었던 민족주의는 어디로 사라져 가버리고 우리의 우방 미국이 덮어씌운 면사포가 정부를 현혹한다. 우리는 정부에게 묻는다. 이것이 비밀 회담이 타결될 당위인가. 대등한 주권국가로서의 외교가 그 꼴이어야만 하는가”(고려대 3·24 선언문). 애초에 지식인 사회의 쿠데타에 대한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한일협정 협상 과정에서 군사정권의 몰주체성과 비민주성이 드러나면서 밀월은 깨졌다. “시체여! 너는 오래전에 이미 죽었다. 죽어서 썩어 가고 있다. 넋 없는 시체여!” 김지하는 1964년 5월 20일 ‘반민족적·반민주적 민족주의 장례식’에서 박정희 정권이 말하는 민족주의의 사망을 선언하는 조종(弔鐘)을 울렸다. 6월 3일 서울시 주요 가로는 1만 명이 넘는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 행렬로 넘쳐흘렀다. 흩날리는 빗속을 묵묵히 걸어가는 대학생(사진=구와바라 시세이, 『가까운 옛날, 사진으로 기록한 민중생활』, 국립중앙박물관)들의 굳은 표정은 그들의 고뇌가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굴욕적 한·일 회담 반대”와 “박정희 정권 퇴진”을 외친 서울 주요 대학 학생들의 시위가 정점에 오른 그날 비상계엄령의 칼바람이 몰아쳤다. 그때 ‘6·3 학생운동’을 이끈 대학생들은 민족을 주체로 한 민주화에 목말라 한 반면 박정희 정권은 제국과 타협 하에 국가주도형 산업화를 꿈꾸었다.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을 씨줄과 날줄 삼아 다원화되고 풍요로운 시민사회를 일군 오늘. 보다 나은 미래로 가기 위한 관용과 대화가 더없이 필요한 시점이다.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