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서울 전용구장 건설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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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난 1일 한.일 축구전이 벌어진 잠실운동장은 줄기찬 봄비와 싸늘한 기온에도 불구하고 6만여명의 대관중이 몰려 스포츠 행사상 신기원을 이룩했다.관중들은 비를 흠뻑 맞아가며 한 마음 한 뜻으로 한국선수를 응원하고 승리를 기뻐했다.

TV시청률도 74%라는 스포츠 중계사상 최고 기록을 이룩했다고 한다.경기가 끝나고 6만여명이 질서정연하게 경기장을 빠져 나가는 광경은 더욱 감동적이었다.

밤늦은 시간인데도 1만여명의 일본인들이 한국인들 사이에 끼여 조용히 걸어 나가는 것을 보고, 한국과 일본의 풀뿌리 (grassroot) 교류가 이제서야 시작됐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경제적 파급효과 큰 대회 그렇다면 축구가 지닌 이 설명하기 어려운 힘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나 자신 "월드컵을 유치하면 무엇이 좋으냐" 는 질문을 많이 받았지만 만족할 만한 대답을 못 해주고 있다.

우리가 아시아에서 최초로 일본과 나란히 월드컵을 개최하게 되면 나라의 위상이 크게 높아지고, 많은 경제적 파급효과를 올릴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월드컵 시청률은 올림픽 대회 전종목 시청률의 약 3배가 되며 이번 98년 프랑스 월드컵 시청자수는 3백70억명에 달하리라고 한다.

열기면에서도 단순한 시청률 비교를 넘어 월드컵쪽이 훨씬 더 열광적이다.그러나 우리가 월드컵 개최국으로서 기대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나라 밖으로 이웃을 새로 만들고 넓혀 가는 좋은 기회가 된다는 사실이다.

나라 안에서도 민주화.산업화 과정에서 쌓여 온 지역.계층간 갈등을 없애고 우리 자신들끼리도 서로 좋은 이웃이 되는 둘도 없는 기회다.지금 동아시아 지역에는 정치.군사적 긴장이 고조돼 가고 있다.

한국이 일본.중국 등과 진정한 이웃이 될 수 있는 길을 축구를 통해 열어 볼 수 없겠느냐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다.지금까지 이 지역에서는 군사적 이해.경제적 거래와 같은 이해관계 위주의 교류가 있었을 뿐 민초 (民草) 간의 진정한 교류는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우리의 의식 속에는 배타 성향이 뿌리 깊게 남아 있는 것 같다.일본인들의 배타성을 비판하는 서구인들이 많이 있는데, 민족의 우수성이나 동질성을 내세우는 한국인이 더 배타적이지 않은지…. "한국의 가을 하늘이 세계에서 가장 푸르다" 고만 배워 온 한국인이 다른 나라에 가 보고는 "다른 나라도 구름만 없으면 하늘 푸르기는 마찬가지" 라며 놀라는 일이 이제는 없어져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잠실운동장을 포함해 국제축구연맹 (FIFA) 규격에 맞는 축구장이 하나도 없다.지난 95년 11월 FIFA 실사단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지 무척 고심한 일이 생각난다.

우리는 사우디아라비아 국가대표팀을 급히 불러 우리의 축구열기나마 보여주기로 했었다.그때도 추운 겨울날씨에 비가 왔으나 관중들이 잠실운동장을 가득 메워 실사단을 놀라게 했다.

설득력 없는 재정타령 그로부터 2년 반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서울의 주경기장 문제 조차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해 국민들은 안타까워하고 있다.일부에서는 서울시의 재정 부담을 이유로 난색을 보이지만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다.

이미 울산.수원.전주.서귀포와 같은 지방도시들도 4만3천여명 규모의 경기장을 국고지원 없이 자체 재원만으로 짓기로 결정했는데 서울시는 건설비의 30%만 부담하겠다면서도 주경기장 건설을 꺼린다면 이해하기 힘든 처사다.많은 국민들은 앞으로 2~3년후에는 우리의 경제가 되살아나 2002년 월드컵 경기를 훌륭히 치르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또한 월드컵 대회의 착실한 준비는 우리 경제의 회복을 위한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있다.4월1일 한.일전때 비가 오는데도 경기장에 나와 열렬히 응원해 주신 여러분께 다시 감사 드린다.

정몽준〈대한축구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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