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산하북녘풍수]9.선죽교에서 박연폭포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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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선죽교 안내원은 타고난 관광안내원이다.녀는 선죽교에 얽힌 일화를 시조로 엮어 들려주었는데 그 줄거리는 이렇다.당시 포은 (圃隱) 정몽주 (鄭夢周) 의 집은 개성 서쪽 선죽동에 있었고 이성계 (李成桂) 의 집은 동쪽 덕안동 (현재 승전동)에 있었다.정몽주가 노모의 병 문안을 가니 노모는 이미 어떤 낌새를 채고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마라/성난 까마귀 흰빛을 새오나니/청강에 고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고 하며 집을 나가지 말라고 권한다.

그러나 포은은 노모의 말을 듣지 않고 그 길로 방원 (芳遠) 을 찾아간다.방원은 포은을 맞아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우리도 이같이 혀져 백년같이 누리리라" 는 회유의 시를 읊는다.만수산 (萬壽山) 은 개성 서쪽 두문봉 북방에 있는 산으로 고려 역대 왕릉이 많이 있어 고려의 북망산으로 불리는 산이다.

이에 포은은 그 유명한 단심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로 대답하고 돌아오는 길에 선죽교에서 살해당하고 만다는 내용이다.

이것이 사실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선죽교 앞에서 그런 설명을 듣는 정경이 그 자체로서 훌륭한 관광감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개성 시내를 벗어나니 이제는 눈에 익은 송악산 (松嶽山) 이 반석처럼 버티고 서서 우리의 우측을 압도하고 있다.일행 중 누군가가 "송악산에서 소나무는 없어지고 악산만 남은 것 같다" 는 말을 했다.

과장의 혐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산에 나무가 너무 적다.송악산이 부소갑이었을 때 신라의 술사 감우 팔원이 소나무를 심으라고 했는데 이제 다시 송악산이 동산 (童山) , 즉 민둥산이 됐으니 내 비록 술사는 아니지만 송악산에 소나무 심기를 권해본다.잠시 개성~평양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왼쪽으로 제석산을 바라보는 위치에서 차는 오른쪽으로 꺾어져 완연한 산길로 들어선다.개성에서 박연폭포까지는 60리라는 데 길이 험해서인지 시간이 꽤 걸린다.

오후4시50분. 이미 짙은 그늘이 지기 시작한 박연폭포에 닿았다.지금은 개성시 박연리로 돼 있지만 본래 우봉현 (牛峰縣)에 속해 있던 곳이다.정확하게는 폭포 아래 깊이 파인 소 (沼)가 박연 (朴淵) 인데 중앙은 돌로 만든 독처럼 생겼지만 물이 고인 범위는 상당히 넓다.소위 지형학자들이 말하는 폭호 (瀑壺.plunge pool)가 이것이다.

겨울이라 물이 줄어 그 양이 평소의 3분의1도 되지 않는다는데 폭포는 쏟아져 내리고 못 물은 시퍼렇게 한기를 돋운다.이런 곳은 울부짖는 듯한 물소리 때문에 잠시 머물며 관상하는 건 몰라도 장기간 거주할 곳은 못된다는 것이 풍수를 공부하는 나의 느낌이다.어찌됐든 '조선 삼대폭포' 중 하나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전설에 옛날 박진사 (朴進士) 라는 이가 있어 못 위에서 피리를 부니 용녀 (龍女)가 감동해 데려다 남편을 삼았으므로 박연이라 이름했다고 한다.바로 옆 조그만 둔덕 위에는 범사정 (泛사亭) 이란 정자가 있었는데 폭포수의 물보라가 그곳까지 튀어오른다.여름철 비가 많이 오면 마치 샤워장을 연상시킬 정도라 한다.

"용랑 (龍娘) 이 피리에 감동하여 선생에 시집가니/백년을 함께 즐겨 정 (情) 도 흐뭇하리라" 는 백운거사 이규보 (李奎報) 의 시는 바로 이 박연의 전설을 읊은 것이다.

폭포 물은 아래로 떨어지나 이어진 물길과 뿜어져 나오는 물보라의 장쾌함은 봉황의 비상 (飛翔) 을 연상케 하니 이 또한 자연의 조화속이다.아래로 떨어지되 위로 솟는 느낌을 주는 우리 폭포는 그래서 상하교접 (上下交接) 의 예로 자주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자고로 시인 묵객들이 박연폭포를 보고 지은 시서화 (詩書畵)가 수만에 이를 것이나 여기 와서 직접 한번 보는 것보다 더 큰 감흥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서울에서 간다고 해도 2시간 남짓하면 충분히 닿을 거리 아닌가.

폭포 위쪽으로 오르면 대흥산성 북문이 나온다.'보존 유적 제126호' 다.북한에서는 '국보 유적' 다음이 '준국보' , 그 다음을 '보존 유적' 이라 한다.대흥산성은 산성골을 안에 넣고 동북쪽의 성거산과 서북쪽의 청량봉, 서남쪽의 천마산, 동남쪽의 인달봉 등 높고 낮은 봉우리들을 자연 지세를 적절히 연결해 쌓은 개성 방어의 북쪽 외성 (外城) 이다.총길이가 10㎞에 이른다.

성 안쪽은 우묵하게 파인 것이 천장지비 (天藏地비) 의 승지 (勝地) 개념에 부합하고 수원이 풍성해 수비에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그래서인지 임진왜란과 일본의 국권 침탈기인 한말에도 이곳이 의병투쟁의 근거가 됐었다고 한다.

성거산은 고려 태조 왕건 (王建) 의 시조인 성골 장군이 살던 곳이라 하며 그에 관한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구룡산 또는 평나산으로도 기록돼 있으나 지금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북문을 지나면 암벽에 북한의 기념비문이 새겨져 있고 거기서 조금 가다보면 2층 기와의 초대소 건물과 조그만 관리인 숙소가 보이는데 지금은 비어 있는 듯했다.계속 가면 관음사와 대흥사가 나온다.

돌아 오는 길, 평양 남방 80㎞ 지점에 있는 휴식처 (휴게소)에 차를 세우고 차 안에서 빵.사과와 '룡성맥주' 로 간식을 들었다.밖으로 나와 하늘을 보니 별들이 마치 은가루를 뿌려 놓은 듯이 빛난다.불빛이 없고 날씨가 맑은데다가 공기오염이 되지 않아서일 것이다.정말 오랜만에 별똥별도 보았다.

너무 황홀해 별똥을 보면 소원을 빌어야 한다는 사실마저 깜빡 잊었다.나중에 후회해보지만 소용없는 일. 하기야 지금 평양 근교 어느 시골에서 하늘의 별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소원 성취가 아니겠는가.

다시 돌아온 평양거리는 상대적으로 밝고 활기에 차있는 것처럼 여겨진다.오후8시40분 호텔 도착. 개성을 봤다는 흥분 탓인가 술을 꽤 많이 마시고 잠자리에 들었다.

글 = 최창조·그림 = 황창배·사진 = 김형수 〈통일문화연구소 차장〉

※다음회는 '황해도 안악고분'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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