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오병상의 시시각각

경희궁과 덕수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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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어느 곳을 찾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마음이야 같을 것이다. 하지만 두 곳의 대조적인 분위기는 전직 대통령의 서거를 보는 시각의 차이를 말해주는 듯하다. 경희궁에선 국민장이라는 형식과 절차만 돋보인다. 죽음 그 자체에 대한 추모 이외의 감정은 절제되어야 할 것처럼 느껴진다. 반면 덕수궁은 해방구다. 온갖 외침이 난무한다. 물론 대부분 애도의 마음들이다. 그런데 간혹 드러나는 증오심이 걸린다. 이른바 이명박 책임론이다. ‘3.5년 뒤에 보자’는 경고에서부터 ‘살인마’라는 저주까지 다양하다. 분향 천막 바로 옆 테이블엔 ‘이명박 탄핵 서명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분향을 끝낸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테이블로 몰린다.

정치 보복이란 주장은 꽤나 광범하게 퍼져있는 듯하다. 노 전 대통령의 측근인 안희정씨는 “정치적 타살”이라고 외쳤다. 정세균 민주당 대표까지 “책임질 사람이 있다”고 주장했다. 검찰의 수사가 이례적으로 길고 광범하게 이어지면서 노 전 대통령에게 지나친 심리적 압박을 가했다는 주장이다. 그런 검찰의 태도 뒤에는 현 정권의 전 정권에 대한 정치 보복 의지가 숨어 있다는 설명도 들린다. 과연 이명박 대통령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였을까.

반면 이런 주장에 대한 매우 강한 반박도 이어지고 있다. 젊은 우파 논객 변희재씨는 “노 전 대통령은 측근 살리고자 몸 던진 조폭 보스”라며 “국민 세금 1원도 쓰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지만원씨는 “시체 가지고 유세하는 노사모 못 보겠다”며 노골적인 반감을 내보였다. 결국 노무현을 죽인 것은 노무현 본인, 혹은 비리를 저지른 측근이란 얘기다. 추모 열기 속에서 고인을 비난하긴 어렵다. 그래서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소수지만 속으로 공감하는 사람은 적지 않아 보인다.

전직 대통령의 죽음이란 충격적 사건을 둘러싼 대립인지라 시퍼렇게 날이 서 있다. 이런 주장으론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어느 쪽도 맞지 않고 바람직스럽지 않다. 진짜 노 전 대통령을 죽인 원흉은 ‘대통령’이란 자리다. 지나친 권력이 집중된, 제왕적 대통령 제도가 비극의 원인이다. 노 전 대통령의 주장대로, 진짜로 몰랐다고 치자. 그렇지만 형이나 부인이 수억원의 돈을 받아 쓸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대통령의 권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권력이 지나치다 보니 친인척까지 권력자가 됐다. 농협이 알짜 회사를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에게 싸게 넘긴 것은 형의 권력이 통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정치 보복의 가능성을 믿는 이유도 대통령이 검찰을 정치적으로 몰아갈 힘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대통령제는 기형이다. 대통령제를 민주적으로 운영하는 기본원칙인 ‘견제와 균형’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이란 제도를 만든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대통령의 권력이 지나치게 커질까 봐 노심초사, 입법부와 사법부가 대통령을 견제하는 온갖 장치를 만들었다. 권력은 견제되지 않으면 남용되며,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또 다른 권력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제도를 수입하면서 그 정신을 소홀히 해왔다. 그 결과 대통령들은 절대권력을 행사했고, 절대부패란 업보를 벗어나지 못했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이 이런 업보를 끊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오병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