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토기 발굴]고조선 연구실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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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국내 고조선 연구는 한마디로 유아기 (幼兒期) 다. 청동기 유물이 있다고 하지만 대부분 남한지역에서 출토된 것이고 일제시대 북한과 만주지역에서 나온 초기 고조선 유물은 극소수만 국내에 남아 있는 정도. 미송리형 토기는 한점도 없었고 청동모. 청동검의 경우도 10점이 채 되지 않는다. 따라서 연구논문도 남한지역 고대국가 연구에 비해 10분의1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연구자도 크게 부족한 실정. 그나마 80년대 들어 북한의 연구자료들이 국내에 전해지면서 기지개를 켜고 있으나 유물과 유구를 직접 발굴하지 못하고 북한학자들의 보고서를 훑어보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북한은 59년 평북 의주군 미송리 유적을 발굴한데 이어 64년 평북 용천군 신암리 유적을 발굴, 고조선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를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특히 60년대 중국과의 협약을 통해 만주지역의 고조선 유물 발굴이 본격화됐고 이때 많은 유물이 북한으로 들어왔다.

93년 단군릉 조성을 계기로 북한에서는 고조선 연구가 극에 달해 고조선이 동양 최초의 금속문화를 창출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지만 아직까지 이를 뒷받침할 자료는 부족하다.

문헌적 연구는 남북한 할 것 없이 아직 논쟁단계에 머무르고 있다.

아직 고조선의 위치조차 확실히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요하 (遼河) 서쪽부터 청천강까지를 고조선의 강역 (疆域) 으로 보는 요동 (遼東) 중심설, 평양을 중심지로 한반도 안에 위치했다는 대동강 중심설, 초기엔 요동지방에 있었으나 후기에 대동강 유역으로 옮겨졌다는 이동설 등으로 나뉜 상태. 특히 북한은 60년대에는 요동 중심설을 주장했으나 단군릉 건설과 함께 대동강 중심설로 바꾸었고 개국시기도 기원전 3000년까지 올려잡고 있어 이에 대한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정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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