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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지는 새내기 영화감독 그들만의 '얼굴'이 없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6면

영화 '이방인' 을 감독한 폴란드 유학생 문승욱은 "폴란드에선 주류영화로 데뷔하는 감독이 1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다. 한국은 지금 신인감독들의 천국" 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폴란드만이 아니라 여타 국가들의 상황을 놓고 보더라도 90년대 충무로는 아마도 해방이후 신인들이 메가폰을 잡기가 가장 손쉬웠던 연대로 기록될 것이다.

지난해의 경우 개봉작 57편 가운데 20편이 '처녀작' 이었고 95년, 96년에도 각각 15편정도가 신인들의 몫이었다.

거칠게 계산해도 4, 5년새 70여명이 '영화감독' 이라는 직업군에 새로 편입됐다.

이같은 신인들의 활약을 두고 '코리언 뉴 웨이브' 가 도래했다며 한 때 나라 안팎의 기대가 대단했었다.

하긴 그럴만도 했다.

적게는 3, 4년 길게는 7, 8년씩 연출부 수업을 거치고서야 겨우 데뷔할 수 있었던 전세대에 비해 90년대 신인들은 대학이나 전문기관에서 교육을 받았거나 유학파들이 상당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배들은 진정한 '세대교체' 를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70년대 이장호.하길종.김호선, 80년대 배창호.장선우.박광수감독들처럼 90년대 세대들이 한국영화의 지형을 변화시키고 있는지를 따져보면 고개를 저을 수 밖에 없다.

선배들의 흥행성을 뛰어넘을 만큼 대중성을 확보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신의 목소리를 가진 '작가' 를 생산해 냈다고 보기도 힘들다.

물론 로맨틱 코미디라는 새로운 흥행 장르를 개척한 김의석의 '결혼이야기' (92년) 나 홍상수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 임순례의 '세친구' 같은 저예산 독립영화의 성과가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로맨틱 코미디 붐은 '건강한 상업정신' 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저질 개그' 영화를 양산하는 쪽으로 흘러갔고 '작가적인 영화' 들은 주목할만한 후속타를 내지 못하고 있다.

올해만해도 상반기에만 10명정도가 새 얼굴이지만 아직 뚜렷한 인상을 남긴 작품을 찾기 힘들다.

허진호의 '8월의 크리스마스' 가 절제된 이야기 전개로 호응을 얻었지만 '새로운 물결' 을 이끌만한 잠재력은 부족했다.

이서군의 '러브 러브' , 문승욱의 '이방인' 은 참담한 실패작이었다.

최근 시사회를 가진 프랑스 유학파 최 호의 '바이 준' 도 함량미달이라는 게 중평이다.

충무로의 '1급 조감독' 이라고 불리며 데뷔작에 큰 기대를 모았던 심승보감독의 '남자이야기' 도 시사 후 별달리 사 줄 만한 점이 없어 관계자들을 안타깝게 했다.

2개월 시한부 인생을 사는 깡패출신의 남자 (최민수)가 숨겨진 아들을 만나 새로운 삶의 의지를 불태운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폭력배들끼리 다투는 액션 장면은 예의 '퍽 퍽' 대는 충무로식의 진부함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최민수가 과거의 삶으로부터 변신해가는 과정도 설득력이 없었다.

마지막에 유치원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는 아들과 아내, 조직원들과의 싸움으로 죽어가는 최민수의 모습이 교차편집으로 보여지면서 관객들의 콧날을 시큰거리게 하지만 지나치게 감상적이라 진짜 감동과는 거리가 있었다.

평론가 이효인씨는 "신인 감독들이 대거 진출한 배경에는 대기업과 젊은 기획자들의 역할이 컸다.

그러나 그동안 쏟아져 나온 신인감독들 대부분은 심하게 말해 '시험용' 이다. 데뷔 이후 두번째 작품을 내놓는 경우도 드물거니와 두번째 작품을 내놓아도 데뷔작을 뛰어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감독들의 자기세계가 분명하지 않고 현실적 여건도 수작을 내는데 도움이 되지 못해 엉성한 작품들이 난무한다" 고 분석했다.

이영기.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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